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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와 편지들 엮은 '비바람 속…' 관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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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겨울로 가는 추운 길목에서 고단하고도 훈훈한 삶의 기록인 일기와 편지들이 엮어져 나왔다.

출판인 한윤수씨는 1970년대 후반 당시 10대 근로자들의 일기와 생활담을 모은 '비바람 속에 피어난 꽃' 을 최근 펴냈다.

어린 근로자들의 따뜻한 마음이 감동적인 이 책은 그러나 열악한 근로환경도 그대로 묻어나 80년 출간되자마자 판금됐다 20년만에 재출간 된 것. 더 나은 내일을 향한 꿈으로 역경을 딛고 오늘을 이뤄낸 자들의 20여년 전 삶과 꿈이 흑백필름처럼 되살아난다.

한편 연극인 손숙씨는 지금 사회 각 분야를 떠받치고 있는 중견 인사 33명의 편지를 모은 '마음에 상처 없는 사람은 없지요' 를 펴냈다.

손씨가 진행하고 있는 라디오 프로에서 지난 1년간 소개된 이 편지들은 자식과 부모.부부.친구들에게 띄운 것들이어서 그 둘 사이에 통하는 따스한 정이 묻어난다.

"옛날과 달리 요즘은 전화와 팩시밀리.e-메일로 편하고 신속하게 정보를 나누는 좋은 면이 있긴 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가슴과 가슴이 만날 수 있는 정다운 편지를 주고받지 않게 되었으니 문명의 이기가 좋은 점만 있는 것 같지는 않구나. 사람들이 바쁜 생활에 휩쓸려 자신의 삶을 찬찬히 되돌아볼 여유도 잃었고, 또 시적인 정감 같은 것도 점점 잃어가는 것 같아 안타까운 생각이 든단다."

프랑스 파리에서 저술활동을 하고 있는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홍세화씨가 한국에 있는 딸에게 쓴 '즐거운 편지' 다.

일기가 자신의 삶을 찬찬히 되돌아보는 글이라면 편지는 거기에 정감을 덧붙여 전하는 글이다.

팩스나 e-메일이 정보를 전하는 속도라면 편지는 '찬찬히' 라는 말대로 느릿느릿 자상한 마음을 전한다. 이 편지에서 홍씨는 딸에게 "육체적인 성장만이 아닌 인간적인 성숙이 필요하다" 고 충고하고 있다.

"엄마의 눈물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지. 너를 생각하면 마음에 걸리는게 너무 많아. 바쁘다는 핑계로 따뜻한 밥 한번 제대로 지어주지 못했고, 소풍이나 운동회 한번 제대로 참석하지도 못했지. 중학교 졸업식조차 참석하지 못했으니까…. " 성교육가 구성애씨가 지방 기숙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다.

바쁜 사회활동 때문에 아들을 살뜰히 돌보지 못해줬음을 사과하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창조할 수 없다' 며 이해하는 바탕을 다지기 위해 학교수업에 충실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비록 병들어 신음하고 있지만 여전히 만물의 고향으로서 대지는 살아있습니다. 아무리 사회가 메말라지고 흉흉하다 하지만 여기 계신 할머니처럼 따스한 가슴은 여전히 춥고 배고픈 자를 보듬어주십니다. 저는 작품의 제목을 '대지 - 어머니' 로 바꾸고 말았습니다. 대지에서 솟아오른 나신(裸身), 사랑과 관용으로 모든 것을 쓰다듬어 안으시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형상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화가 임옥상씨가 자신의 작품을 위해 기꺼이 나체 모델이 돼 준 농부 할머니에게 쓴 편지다.

"좋은 일 하는 것 같은데, 벗어야제" 하며 화가 앞에서 옷을 벗은 할머니에게서 임씨는 모든 것을 보듬어 안는 대지 - 어머니의 참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60년대 이후 산업화가 진전됨에 따라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대지의 어머니를 떠나 도시 산업역군으로 편입됐다.

채 스무살도 안된 나이에 정든 고향과 부모를 떠나와 봉제와 전자제품 조립, 막노동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근로자들의 고단한 삶이 '비바람 속에 피어난 꽃' 에 가득하다.

시인 박노해씨는 "정직하게 땀 흘리며 노동하고 인간다운 미래를 꿈꾸던 어린 노동자들의 이 글을 눈물로 읽었다" 고 밝힌다.

"그건 그렇고… 동생이 밤 늦도록 공부하는 게 대견스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집안에서 일어나는 가족들의 이해관계 같은 것들은 모른다는 듯이 오로지 공부만 하는 것이 대견하고 부러운 것이다." 초등학교만 나오고 나서 금속노동에 뛰어든 노동자의 수기 중 한부분이다.

동생들의 학비를 위해 어린 누나.형들은 산업 일선으로 나섰다. 잠을 쫓기 위해 각성제 타이밍을 먹고 미싱 바늘에 찔려가면서 오늘의 경제와 사회를 일궈냈다.

못배우고 어린 나이지만 당시의 근로자들에게는 사회를 향한 꿈이 있었다. 기술이나 돈으로서 뿐 아니라 인간됨에서도 챔피언이 되겠다는 그들이 지금 40대 중년으로 사회를 이만큼이나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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