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미술관에서 온 엽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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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미술 담당 기자를 하게 되면서 확인한 사실 하나. 화랑이나 미술관이 아름다운 곳일 뿐 아니라 아무 부담없이 들를 수 있는 아늑한 장소라는 점이다.

데이트 장소로도 훌륭하다. 전시장은 길가에, 가까운 곳에 있다. 그냥 들어가면 된다. 특별한 대형 기획전이 아니라면 입장료는 없는 게 보통이다.

입구에 직원이 있지만 "어떻게 오셨어요?" "그림 사시게요?" 하고 묻지 않는다.

큐레이터들은 말한다. "가장 허탈할 때는 공들여 준비한 전시에 사람들이 오지 않을 때" 라고. 미술관이나 상업화랑이나 관객이 많기를 바라는 건 마찬가지다.

전시장은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조용하고 아늑한 공간. 들어서기만 하면 그림.조각.사진.비디오.설치 등을 만날 수 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그냥 보고 느끼면 된다.

혹시 아는가. 내면의 소리를 들려주는 조각이나 그림이라도 있을지.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난해한 작품이라면? 고민하지 말자. 미국의 미술잡지 '아트뉴스' 9월호는 현대미술을 어렵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위한 감상법을 특집으로 냈다.

이에 따르면 난해한 작품을 가장 잘 감상하는 건 어린이들이라고 한다.

부담없이 관찰하고 참여하고 발견의 기쁨을 느낀다는 것. 어른들처럼 허리에 손을 얹고 "저게 뭐지" 하고 고심하지 않기 때문이라나. 우리도 그저 작품에서 작품으로 한가롭게 걸음을 옮기면 된다.

그 순간 잠깐 세상사를 잊을 수 있으면 좋은 것이다. 말을 걸어오는 작품은 없는지 마음의 귀를 기울여 보고, 뭔가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 앞에서는 회상에 잠겨보자. 내가 월급쟁이라는 것도, 잠시 후에 누군가를 만나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도 잊는 시간. 이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전시장을 나올 때는 '문화적인 시간을 즐겼다' 는 작은 보람을 느끼게 될 것이다. 마치 어린 시절 작은 선행을 하고서 뜻밖에 뿌듯해졌던 느낌과 유사하다.

전망 좋은 카페가 딸려 있는 곳이라면 좀더 호사를 즐길 수 있다.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 4층의 찻집에선 경복궁이 내려다보인다. 주목이며 단풍이며 느릅나무들이 무리지어 서 있는 고궁 풍경은 '가을이구나'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오게 한다.

전시 중인 윤중식 화백의 그림을 감상한 뒤에 찾아볼 만하다.

신문로 성곡미술관의 야외 찻집도 분위기가 그만이다. 찻집 뒤편의 작은 언덕은 조각품과 나무.잔디가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을 이룬다.

젊은 사진작가 6인의 기획전을 보다가 따뜻한 솔잎차를 마시면 문화인이 된 기분이다.

평창동 가나아트센터도 좋다. 3층 빌모트 카페에서 올려다보는 북한산은 단풍과 소나무.참나무들이 점묘법의 풍경화를 이루고 있다.

중광스님의 천진스런 달마도와 그림들을 감상한 뒤 즐겨볼 만한 풍광이다.

차를 마신 다음 전시장을 한번 더 둘러보면 어떨까. 마음 편하게 두번째 인사를 하면 작품이 좀더 깊은 속을 내보일지도 모르니까.

늦가을이다. 전시장에 가서 문화적인 정취를 느껴보자. 우선은 시간이 날 때 잠깐 들르자. 다음은 산책삼아 한번 가보자. 그 다음엔 작정하고 찾아갈 수도 있다.

그림을 보는 눈도 생기고, 무엇보다 본 것만큼, 일상사를 잊은 것만큼 이익이다. 혹시 취미가 붙어서 공부를 해도 좋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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