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보균의 세상 탐사] 우리법연구회, 하나회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51호 02면

우리법연구회가 궁금하다. 한나라당은 “법원 내 하나회”라고 규정한다. 하나회는 군부 내 사조직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군대 시절 회장이었다. 5공 권력의 기반이었다. 우리법연구회는 그런 비유를 어이없어 한다. “권력을 사유화한 군사 정권의 사조직에 우리를 갖다 붙이느냐”고 반발한다.

하나회 출신도 그런 비유에 불만이다. 허화평 전 의원은 5공 초기 권력의 키 플레이어였다. 그는 “하나회의 출발은 순수했다. 사법부 내 좌파적 이념화를 모색하는 우리법연구회와 다르다. 우리는 강군(强軍)과 군 내 부패를 없애자는 뜻으로 출발했다”고 주장한다.

그 비유는 ‘좌 편향 재판, 튀는 판결’ 논란 때문이다. 민노당 당직자 폭력의 공소 기각, 용산 사건 미공개 기록의 공개, ‘강기갑 공중부양’ 무죄, PD수첩 무죄로 이어지는 흐름은 혼란스럽다. 담당 판사 중에 우리법연구회 소속도 있고, 아닌 법관도 있다. 논란의 핵심은 그런 식의 판결 분위기를 연구회가 만들고 확산시켰다는 것이다. 우리법연구회장인 오재성 성남지원 부장판사는 그런 논란과 의심을 “부당하다”고 반박한다.

연구회는 순수 학술 모임을 표방한다. 하지만 그 정체성 논란은 깊어지고 있다. 그 단체의 전 회장인 문형배 부산지법 부장판사는 “대법원장을 지지하고 주류의 일원으로 편입된 이상 기존 주류의 잘못을 되풀이 해선 안 된다. 박시환 정신으로 함께 나갈 것”이라고 말한다. 이쯤 되면 비밀결사의 분위기가 넘쳐난다. 편 가르기의 배타성을 의심받을 만하다. 소설가 이문열씨는 “같은 좌파식 논리를 생산하고 유포하는 단체가 어떻게 순수 연구 모임이냐”고 반문한다.

그 조직은 사법개혁의 깃발 속에서 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8년 6월 2차 사법 파동이 계기였다. 파동은 노태우 정권 때 김용철 대법원장의 유임을 저지한 서명 운동이다. 주동 그룹이 연구회 창설 멤버다. 김종훈 변호사(이용훈 대법원장의 첫 비서실장)도 그중 한 명이다. 그는 “서명 운동은 사법 조직 내 민주화 운동 세력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사법연수원 13기가 나오면서 일부나마 소위 운동권이 사법 조직에 편입됐다”고 회고했다. 그가 연구회 홈페이지에 올린 글이다.

우리법연구회는 노무현 정권 때 약진했다. 그 시절 386참모들은 사법부의 사회 변화 역량에 주목했다. ‘재판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점에 집착했다. 그들은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벤치마킹했다. 1930년대 후반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은 대법원의 위헌 판결로 제동이 걸렸다. 그러자 루스벨트는 대법원 개조의 승부수를 던졌다. 2004년 10월 수도이전에 대한 위헌 결정이 났다. 386참모들은 분개했다. 노무현 정권은 사법부·헌법재판소의 인적 개혁을 시도했다. 그런 흐름 속에 박시환 변호사가 대법관으로 임명됐다.

박 대법관이 추구하는 모임의 방향은 학술 모임 쪽이 아니다. 그는 모임의 초대 회장이고 간판이다. “법원을 이상적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목표”(연구회 논문집)라고 했다. 지난해 5월 신영철 대법관 파동의 배후로 우리법연구회가 의심을 샀다. 당시 박 대법관은 젊은 판사들의 집단 행동을 부추겼다는 비난을 받았다. 집단의 독특한 속성이 있다. 순수함을 내걸어도 어느 순간 집단적 이념, 파벌성, 배타적 이기주의에 빠진다. 연구회의 행태도 그런 속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판사는 고독·절제·균형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런 덕목으로 사법적 정의와 권위를 축적해왔다. 이젠 그런 대목에 심한 상처가 났다. 대다수 국민은 법정에 갈 때 우리법연구회 판사인지 아닌지를 따지게 됐다. 그것은 사법부 전체의 신뢰와 연결돼 있다. 이 대법원장은 국민적 궁금증과 논란을 정리해줘야 한다. 우리법연구회의 성격과 해체 문제에 대한 입장을 내놓아야 한다. 이 대법원장은 침묵을 깰 때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