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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륙에서 구대륙으로 … 골프 권력이동 시작됐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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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호 12면

아부다비 골프 챔피언십에는 세계랭킹 10위 이내 선수가 5명이나 출전했다. 같은 기간 미국의 밥 호프 클래식에는 톱10 이내 선수가 한 명도 없었다. 사진은 독일의 마틴 카이머. [아부다비 로이터=연합뉴스]

“새벽 일찍 일어나서 유러피언 투어 중계를 보자.”
최근 미국 플로리다의 마이애미 헤럴드지에 나온 케빈 커리의 골프 칼럼 제목이다. 플로리다는 미국 PGA 투어와 LPGA 투어 본부, 골프 명예의 전당 등이 있는 미국 골프의 메카다. 이 지역 최고 유력지에서 나온 글은 미국 골프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PGA 투어 커미셔너 팀 핀쳄이 매우 서운해할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기사가 나올 만하다. 요즘은 유러피언 투어의 경기 수준이 더 높기 때문이다.

2010 유러피언 투어 관전 포인트

1월 21일 캘리포니아주 라퀸타에서 열린 미국 PGA 투어 밥 호프 클래식에 나온 선수 중 세계 랭킹이 가장 높은 선수는 37위인 마이크 위어였다. 쉽게 말해 스타 선수가 한 명도 나오지 않은, 먹을 만한 반찬이 별로 없는 밥상이다. 반면 같은 시간 아랍에미리트의 아부다비에서 열린 유러피언 투어 아부다비 챔피언십에는 세계 랭킹 10위 이내 선수 중 5명이 참가했다. 앤서니 김 등 미국 스타를 포함, 세계 랭킹 50위 이내 선수가 18명이었다. 골프를 좋아하는 미국 팬이라면 김 빠진 밥, 밥 호프 클래식이 아니라 유러피언 투어를 보는 것이 당연하다.

골프팬들은 유러피언 투어가 PGA 투어를 이긴 것은 중동 국가가 오일 달러를 뿌려 생긴 일종의 해프닝일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요즘 흔하게 나오고 있다. 유러피언 투어는 연중 3분의 1 정도는 PGA 투어보다 뛰어난 선수를 끌어 모아 박진감 넘치는 대회를 치른다. LPGA 투어를 보는 한국의 골프팬들이 그렇듯, 미국의 골프광들도 유러피언 투어를 보기 위해 새벽 잠을 줄여야 할 상황이다.

미국 투어 고집하던 케니 페리도 유럽으로
골프의 중심이 영국에서 신대륙으로 이동한 계기는 1913년 US 오픈이었다. 그해 보스턴 인근 더 컨트리 클럽에서 열린 US 오픈에서 당시 20세의 보스턴 토박이 아마추어인 프랜시스 오메이가 영국에서 온 두 골리앗을 쓰러뜨렸다. 오픈(브리티시 오픈) 챔피언십 6회 우승자이자 당대 최고 골퍼인 영국의 해리 바든과 장타로 유명한 테드 레이였는데 둘은 이전까지 미국으로 원정을 나와 미국 프로들을 어린아이 손목 꺾듯 제압하고 다녔다. 그런 그들이 열 살짜리 꼬마 캐디와 힘을 합친 스무 살 아마추어 오메이에게 나가 떨어졌다. 오메이는 “연장전에 접어들었을 때 담배를 쥔 바든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보고 우승을 확신했다”고 했다.

28일 시작된 샌디에이고 오픈에 출전한 미국의 간판 필 미켈슨. [샌디에이고 AP=연합뉴스]

골프 역사상 최대의 이변이었다. 박세리가 US 여자오픈에서 우승했을 때 한국에서 그런 것 이상으로 미국이 들썩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에서 골프는 인기 스포츠가 됐고 현대 골프가 시작된다. 현대 골프는 미국의 것이었다. 두 차례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영국의 골프 선수들은 씨가 말랐다. 골프장은 군 비행장 등으로 징발됐다. 미국은 정치나 경제뿐 아니라 골프에서도 수퍼 파워로 확고한 기반을 세웠다.

월터 헤이건-벤 호건-아널드 파머-잭 니클라우스-톰 웟슨-타이거 우즈 등 뛰어난 선수들은 모두 미국에서 나왔다. 죽어가던 유럽 골프를 다시 일으킨 선수는 유럽 사람이 아니라 미국인인 아널드 파머였다. 1960년대 슈퍼스타인 파머는 오픈 챔피언십에 꾸준히 참가하면서 골프의 고향에 생기를 불어 넣었다. 영국-아일랜드 연합과 미국의 골프 대항전(79년 이후 유럽과 미국의 대륙 대항전으로 바뀌었다)인 라이더컵에서 미국은 쉽게 승리했다. 투어 간의 싸움에서도 그랬다. 90년대 초반까지 미국 골프계에서는 “유러피언 투어는 미국 2부 투어보다 못하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하곤 했다. PGA 투어는 엄청난 상금으로 전 세계의 유망주를 쓸어갔다. 미국으로 건너가기를 거부했던 세베 바에스트로스(스페인)나 콜린 몽고메리(스코틀랜드), 미겔 앙헬 히메네스(스페인) 같은 선수가 있기는 했지만 주류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다르다. 아직도 PGA 투어가 우위인 것은 확실하지만 과거처럼 압도적이지는 못하다. 유러피언 투어는 매주 최고 선수들의 출전을 놓고 PGA 투어와 경쟁하고 있다. 이길 때도 많다. 월스트리트 저널에 의하면 개막전인 SBS챔피언십은 시청률이 지난해보다 21%, 소니오픈도 시청률이 30%나 급감했다. 밥 호프 클래식은 훨씬 더 심각했다.

28일 샌디에이고 토리 파인스 골프장에서 시작된 대회는 인기 스타 필 미켈슨이 꼭 참가하는데도 대회 직전에야 가까스로 파머스 인슈어런스라는 스폰서를 찾았다. 그러나 이 보험회사가 내는 후원금은 과거 GM이 냈던 돈의 절반에 불과하다. 과거 뷰익 인비테이셔널로 불렸던 이 대회가 앞으로 어떤 시련을 겪을지는 PGA 투어도 모른다. 반면 파머스 인슈어런스 오픈과 동시에 시작한 유러피언 투어 카타르 마스터스에는 리 웨스트우드, 헨릭 스텐손, 폴 케이시, 레티프 구센, 카밀로 비제이가스 등 스타들이 즐비하다. 미국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았던 케니 페리도 “PGA 투어가 위기인데 어딜 나가느냐”는 비난을 무릅쓰고 사막으로 왔다. 미국의 경제위기로 PGA 투어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양 투어는 선수 끌어 모으기 전쟁을 치르고 있다.

골프의 특급 선수들은 메이저 대회 위주로 스케줄을 짠다. 메이저 우승을 유난히 중시한 잭 니클라우스와 타이거 우즈의 영향 때문이다. 선수들은 메이저 대회를 앞두고 1~2주 정도는 대회가 열리는 대륙에서 경기하며 시차와 코스에 적응한다. PGA 투어가 유리하다. 메이저 대회는 미국에서 3개, 유럽에서 1개 열리기 때문이다.다음은 돈이다. 프로선수들이 상금이 많은 대회에 나가는 것은 당연하다. 월드골프챔피언십(WGC),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같은 ‘돈 잔치’ 대회에 세계 랭킹 상위 선수들은 거의 빠짐없이 참가한다. WGC 4개 대회 중 3개가 미국에서 열리기 때문에 역시 PGA 투어가 유리하다. PGA 투어는 유러피언 투어에 비해 상금도 많다. 그러나 PGA 투어의 우위는 거기까지다.

아부다비 투어 초청료만 200만 달러
유러피언 투어에는 초청료(appearance fee)가 있다. 유명 선수를 데려오기 위해 상금과는 별도로 주는 돈이다. 반면 PGA 투어는 초청료가 전혀 없다. 개별 선수에게 쓰는 돈을 없애고 총상금을 늘리는 것이 낫다는 생각으로 금지했다. 상금이 많으면 B급 선수들을 모두 모을 수 있다. 그러나 팬들은 그런 선수들에게 별 관심이 없다.

요즘 A급 선수들은 초청료로 움직인다. 미국 선수들도 변했다. 오랫동안 미국 선수들은 해외로 가지 않았다. 귀찮다고 메이저 대회인 오픈 챔피언십 출전을 포기하는 선수도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초청료를 받고 유러피언 투어에 나오곤 한다. 아부다비 챔피언십 우승자인 마틴 카이메르(독일)는 25만 유로의 우승 상금 외에 그만한 초청료를 더 받았다. 대회 조직위는 초청료로 200만 달러를 들였는데 매우 만족하는 표정이다. 요즘 인기가 높은 카이메르와 이언 폴터(영국), 로리 매킬로이(북아일랜드)가 마지막 조에서 뜨겁게 경쟁했기 때문이다.

가령 리 웨스트우드(잉글랜드), 매킬로이, 세르히오 가르시아(스페인), 애덤 스콧(호주) 같은 스타들의 2010년 동선은 대략 이럴 것이다. 1월 중순부터는 중동 스윙(아부다비-카타르-두바이)에 참가해 초청료를 챙기고 왕실과 유대를 쌓는다. 그렇게 해서 중동에 골프장 설계 프로젝트를 딴다면 더할 나위 없다.

2~4월은 미국에서 보낸다. WGC 2개 대회와 첫 메이저 대회인 마스터스가 미국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5월에는 영국으로 간다. 총상금 450만 유로(약 75억원)가 걸린 유러피언 투어 PGA 챔피언십에 나가기 위해서다. 상금도 중요하지만 레이스투 두바이(유러피언 투어 플레이오프)에 참가하기 위해선 유럽 대회에 가끔 얼굴을 비쳐야 한다.6월에는 대서양을 넘어 미국으로 가 US 오픈을 준비하고 7월에는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오픈(브리티시 오픈)에 참가한다. 올해 오픈은 골프의 성지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열리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다. 미국 선수들도 일찍 대서양을 건너가 유러피언 투어에 참가해 바람 많은 링크스에 적응해야 한다.

이후 다시 미국행이다. 8월, 마지막 메이저 대회인 PGA 챔피언십에 나가고 9월에는 1000만 달러가 걸린 PGA 투어 플레이오프 페덱스컵에 나간다. 10월에는 라이더컵 때문에 영국에 머물고 11월에는 유러피언 투어의 플레이오프인 레이스투 두바이의 상금(약 87억원)을 따기 위해 중동으로 돌아간다. 미국 이외의 선수들은 미국과 유럽에서 반반씩을 보내게 된다. 유럽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선수들은 유럽 체류 기간이 훨씬 더 길다. 세계 랭킹 10위인 21세의 골프 천재인 로리 매킬로이는 지난해 PGA 투어의 특별 초청을 거부했다.

PGA 투어와 유러피언 투어의 최전선은 아시아다. 자국 시장에서 승승장구하던 PGA 투어가 경기 침체로 위기에 몰리자 아시아를 공략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어니 엘스(남아공)는 “유러피언 투어가 30년간 중국에서 대회를 열었는데 PGA 투어와 대결이 시작될 것”이라면서 “어떤 투어가 최고 선수들을 모을 수 있는가, 어떤 투어가 스폰서에게 어필할 수 있는가가 승패를 결정할 것”이라고 했다. 미국의 A급 선수들은 미국 밖으로 나오는 것을 매우 부담스러워한다. 초청료가 있으면 장시간 비행기를 탈 수 있지만 PGA 투어는 초청료가 없다. PGA 투어의 딜레마다.

이전까지 전 세계를 도는 투어라는 낭만적인 구호를 외치던 유러피언 투어는 아시아에서 본격 마케팅을 시작했다. 아시아 시장을 지키기 위해 아시안 투어와 연합, 유라시아 투어를 만들었다. 그 이름으로 인도 뉴델리에서 아반사 마스터스를 시작한다. 인도의 골프 역사는 미국보다 길다. 성장 잠재력도 크다. 유러피언 투어는 중국과 인도라는 거대 시장 두 곳에 깃발을 꽂았다.

중동에서도 대단하다. 유러피언 투어의 카타르 마스터스는 알자지라 방송과 서브 스폰서 계약을 했다. 알자지라는 과거 테러단체 알카에다의 얘기를 전하던 방송사다. 그만큼 유러피언 투어는 적극적으로 아시아에서 마케팅을 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의 진짜 대결은 10월 웨일스에서 벌어진다. 켈틱 매너 리조트에서 벌어지는 라이더컵에서다. 유러피언 투어는 반드시 이기겠다는 의지가 대단하다. 6월 6월 켈틱 매너 골프장에서 사전 답사를 겸한 대회를 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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