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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 인터뷰] 세계디자인대회 안상수 집행위원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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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안상수(48.홍익대 시각디자인과)교수. 1985년 독특한 한글서체 '안상수체' 를 개발, 인쇄문화에 새 바람을 일으킨 인물. '이상체' '미르체' '마노체' 등을 차례로 선보이며 본격적인 타이포그래피(글꼴과 그 응용)디자인 시대를 열었다.

지난해 크로아티아에서 열린 시각커뮤니케이션 국제전에서 한국인 최초로 대상을 받았으며 현재 세계 그래픽디자인단체협의회(ICOGRADA)부회장으로 있다.

24일 개막하는 '2000 세계그래픽디자인대회' 집행위원장으로 동분서주 중인 안교수를 만나봤다.

- 이번 대회가 국내 디자인계에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보십니까.

"한국 디자인이 한단계 올라서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성인식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세계의 디자인을 주도하는 톱스타들을 직접 만나 체취를 맡아가면서 함께 호흡하는 기회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 것으로 잘 할 수 있다' 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번 대회는 우리가 밖으로 나가는 문이면서 세계가 우리를 들여다 보는 창문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 디자인을 보는 우리 사회의 눈이 아직은 다양하게 열려 있지 못한 것 같습니다만.

"그동안 수출상품의 경쟁력을 위한 제품 디자인이라는 좁은 분야에만 관심이 쏠려 있었어요. 나마 외국 구매자의 당장의 입맛에 맞추는 데 급급했는데 이런 디자인으로는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 문화의 고유한 정체성을 나타내는 디자인이 가장 좋은 디자인이지요. '이것은 세계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입니다."

- 디자인의 좋고 나쁨이 사람들의 생활 문화 전반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는 말씀을 해오셨는데.

"그렇습니다. 예컨대 TV 화면이나 신문 지면의 디자인이 난삽하고 선정적이라면 이를 매일 접하지 않을 수 없는 국민의 미감도 여기에 세뇌되고 영향을 받습니다.

그 결과는 물건을 구매하는 등 미와 관련된 선택을 할 때 나타나게 되지요. 길거리의 간판, 매스미디어의 그래픽, 동사무소의 서류신청 양식, 학교 졸업장, 러브호텔의 유치한 디자인 등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엉켜 돌아가는 것입니다. "

- 외국의 예와 비교해가며 설명을 해주시지요.

"우리 여권을 볼까요. 첫눈에 다른 나라 여권에 비해 값싸보이지 않아요. 외국 공항 입국대에서 여권을 들고 있으면 자존심이 상합니다.

우리나라 돈은 척 보기만 해도 가치가 없어 보입니다. 달러화 디자인이 묵직해 보이는 것과 대조됩니다.

세계에서 가장 디자인이 잘 된 돈은 네덜란드 화폐입니다. 전설적인 화폐 디자이너 옥세나의 작품으로 수집 대상입니다. 유로화로 바꾸지 않겠다는 국민운동까지 벌어지고 있습니다.

네덜란드는 스튜디오 둠바라는 디자인회사에서 경찰 복장과 오토바이를 일괄 디자인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네덜란드는 렘브란트와 반 고흐의 나라라는 점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일본만 해도 디자인 선진국입니다. 입국 신고서 양식을 봐도 깔끔한 게 우리와는 딴판입니다. 우리는 경찰차 디자인도 미국 영화에서 보는 미제같습니다. 아이덴티티가 없는 거지요. "

- 국민의 미감이 낮으면 어떤 피해가 있습니까.

"아름다움과 질서.조화는 사람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자부심과 자존심을 높여줍니다. 서울의 거리는 그 자체가 피로를 느끼게 하고 스트레스를 줍니다.

디자인이 잘못돼 있기 때문입니다. 디자인은 삶의 질이자 문화의 정체성 그 자체입니다. 우리다운 디자인에 대해 이제 사람들이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라야 세계에서 인정받을 수 있기도 하고. "

- 우리에게 그럴 만한 디자인이 있습니까.

"기막히게 좋은 디자인은 한글입니다. 글자를 디자인해 창조한 나라는 우리밖에 없습니다. 한자 문화권 속에서 한자와는 전혀 다른 글자를 만든 독창성은 독보적입니다.

기능성과 조형성이 정말 뛰어나다는 점은 세계 모든 학자가 인정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글자는 디자인에 있어 가장 중추적인 뼈대이자 인프라입니다.

우리 시각문화의 거의 전부는 글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훌륭한 형태와 조형미를 지닌 한글 시각문화의 가치를 높이는 데 일차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좋은 글꼴을 만드는 것뿐 아니라 이를 기초로 책이나 신문.TV 자막을 만드는 것, 즉 글꼴을 부리는 것의 양자를 합쳐 타이포그래피라고 합니다.

우리는 글꼴을 만들고 부리는 데 모두 미흡하지요. 한글 타이포그래피 운동을 벌여야 합니다. 예를 들어 도로표지판을 만드는 것은 엄청난 타이포그래픽 시스템 디자인입니다. 과학과 실험 등을 통해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데 우리는 그런 것이 약합니다."

- 한글 타이포그래피는 현재 어느 수준입니까.

" 라틴 알파벳의 나이를 1백살로 본다면 한자는 환갑쯤 된 글자입니다. 일본글은 20대입니다. 한글은 10대 초반이라고 보면 됩니다. 한글은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며 디자인도 탁월해 흠잡을 데 없는 글자입니다.

그러나 이 글꼴을 어떻게 개발하고 부리느냐에 우리 사회가 관심을 가진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외국처럼 많은 글자체가 확립된 것도 아니고. 우리 글꼴은 현재 난삽하고 혼돈된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세련돼갈 것으로 봅니다. "

- 한글 이외에 우리가 살려나가야 할 독창적인 문화유산은 없을까요.

"고유섭 선생 같은 분은 우리 시각 문화의 특징으로 '구수한 큰 맛' 을 꼽기도 했습니다. 저는 공감은 가지만 마음에 잘 와닿지 않습니다.

훌륭한 도자기나 석탑.단청이라 하더라도 모두 중국에도 있는 것입니다. 약간 변형하고 개선한 데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존심과 자부심을 가지고 내세울 수 있는 독창적 디자인 문화유산은 한글 하나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엄청난 독창성과 과학성.모던한 맛을 지녔거든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것입니다. 제가 시각디자인 전문가니까 제 분야에만 한정해서 하는 말로 생각해 주십시오. " (이같은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는 85년 이래 '한국전통문양집' 시리즈를 무려 15권이나 발행하면서 한국적 디자인의 뿌리찾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누구입니까.

"세종대왕과 이상, 두사람뿐입니다. 세종대왕이야 한글을 창제하신 분이니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상은 한국에서 모던한 타이포그래피의 효시라고 할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시만 쓴 게 아니라 삽화도 많이 그렸고, 책 표지도 많이 디자인했습니다. 희한할 만큼 엄청난 디자인적 감성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묘하게 시대의 디자인적 요구에 감응했던 인물로 봅니다. 뒤를 잇는 사람이 없어 맥이 끊긴 것이 아쉽습니다." (안상수씨가 '이상체' 글꼴을 개발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 디자인과 관련해 시급히 개선해야 할 상황을 지적해주십시오.

"우선 공공 디자인이 좋아져야 합니다. 디자인을 신중하게 대했으면 합니다. 지금 지방자치단체를 포함해 공공기관마다 자체 통합이미지(CI)와 캐릭터를 만들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생산된 것이 대개는 시각적인 피로와 혼란을 일으킬 뿐이라는 점입니다. 캐릭터가 필요한 곳이 있고 그렇지 않은 곳이 있는데 아무나 만드는 것도 문제입니다. 경찰청 같은 데는 포돌이 캐릭터가 굳이 필요없다고 봅니다.

이미지에 딱 맞는 것이 아니라면 포기해야 합니다. 친근한 것과 가벼운 것은 다릅니다. 정부나 공공기관이 가져야 하는 신뢰감을 가볍게 만드는 캐릭터나 디자인이 많습니다. 정공법으로 접근한 신중한 디자인을 찾기가 힘들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

- 한국 디자인에서 기술적으로, 특히 부족한 점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디테일이 부족하다는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좋은 디자인과 그렇지 않은 디자인의 차이는 감각뿐 아니라 마무리가 꼼꼼하냐 아니냐에서도 옵니다.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디테일 속에 신이 있다' 고 말한 외국의 전문가도 있습니다.

공예가적 장인정신의 맥을 되살려야 합니다. 조선시대 목가구나 불국사 다보탑을 보면 엄청나게 세심하게 마무리한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이 장면에서 그는 중앙일보 편집국 벽에 붙어 있는 표어 '한 글자 한 단어가 중앙일보 얼굴이다' 를 가리켰다). 저 표어와 같은 내용입니다.

신문의 단어 하나도 천금 같은 게 있고 풀풀 날아다니는 것이 있습니다. "

- 본인의 디자인 철학을 말씀해주시지요.

"20세기 초 독일에서 바우하우스가 문을 연 이래 20세기 디자인은 콘트라스트의 미학, 쉽게 말해 '튀는 대비의 미학' 이 지배해왔습니다.

자연에 없는 기하학적 직선과 박스를 사용하면서 하나를 강조하려니 다른 하나는 상대적으로 무시하는 기법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시각적 피로를 덜 유발하고 보다 사람이나 생물의 본성에 맞는 어울림'과 조화'의 미학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윤리와 미학 차원에서 나아가야 할 거시적인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철학이라기보다는 바람입니다."

- 어떤 디자인을 하고 싶습니까.

"마흔살이 넘으면서부터 시의 세계를 알게 됐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일본의 하이쿠와 한국의 최승호 시인을 특히 좋아합니다. 시가 갖는 상징성.간결함, 그 속에서 번득이는 영감에 깊이 매료됐습니다. 한편의 시 같은 디자인을 하는 게 꿈입니다. "

- 이번 세계 그래픽대회의 주제어도 한글 '어울림' 이지요.

"3년 전 우루과이 총회에서 제가 제안한 것을 많은 사람이 호응해줘 채택됐습니다. 다분히 직관적이었던 '어울림의 철학' 을 여러 사회학자.철학자가 뒷받침해줘 큰 힘을 얻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도올 김용옥 선생이 이번 대회에서 '어울림 산조' 란 제목으로 주제 강연을 하는 것은 철학자가 디자이너에게 주는 이론적 도움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

- 마지막으로 디자인의 발전을 위해 당부하고 싶은 말은 무엇입니까.

"일본은 90년대 초부터 디자인을 문화적 전략산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도 언론.교육기관.기업이 인식을 같이하고 노력한다면 충분히 디자인 강국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리=조현욱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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