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세계화 반대시위의 모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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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오는 19일부터 열리는 아시아.유럽 정상회의(ASEM)를 겨냥한 비정부 기구(NGO)들의 세계화 반대시위 계획은 한국 현실의 모순을 이중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국 경제회복이 더딘 이유는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세계화 정책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는 데 있다는 게 대다수 경제평론가의 지적이다.

요약하면 "자본.노동시장의 각종 규제를 철폐하라. 잘하는 기업만 살아남을 수 있도록 구조조정을 더욱 강화하고 투명성을 높여라. 그것이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다" 등이다.

그러나 NGO 시위는 "세계화를 제대로 하라" 가 아니라 "해서는 안된다" 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국내 1백3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결성한 'ASEM 2000 민간 포럼' (공동대표 단병호)은 오는 17~21일 건국대에서 '세계화에 도전하는 민중의 행동과 연대' 를 주제로 워크숍을 연다.

민간포럼은 20일 삼성동 ASEM 회의장 부근에서 2만여명이 참여하는 '신자유주의 반대 서울행동' 연합시위도 계획하고 있다.

ASEM을 겨냥한 것은 여기서 논의될 자유무역협정.농업자유화 등이 세계화를 촉진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노동법.구조조정 등의 구체적인 정책이 아닌 추상적인 경제이념(세계화)을 주된 타깃으로 삼아 벌이는 대규모 시위는 국내에서 이번이 처음이다.

NGO들이 세계화에 반대하는 것은 세계화가 초국적 자본의 국경없는 이동을 포함, 시장경쟁 원리를 금과옥조로 하는 신자유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강대국 자본에는 광대한 세계시장을 제공하지만 저개발국에는 가혹한 경쟁만을 강요하게 된다는 것이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격차가 더 커지고 계층간에도 빈부차이를 심화시키는 정글 경쟁논리가 세계화요, 신자유주의라고 프랑스의 석학 피에르 부르디외가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사회경제적 약자를 보호하는 국가의 영향력은 모든 공공영역에서 쇠퇴하고 이윤만을 앞세운 자본은 문화예술까지 획일화.저질화한다고 부르디외는 덧붙인다.

NGO 시위와 관련한 한국의 모순은 정부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표방만 할 뿐 시행에 있어서는 질곡을 거듭하고 있다는 점이다.

선단식 재벌경영 존치, 도처에 휘두르는 정부규제의 칼, 시장을 왜곡시키는 관치금융, 어정쩡한 노동정책 등이 질곡의 대표적 예다.

게다가 금융개혁.재벌정책.공기업 민영화 등 각종 경제정책의 운영과정을 보면 구조적.장기적인 효율화보다 일회용 땜질 처방으로 일관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디 경제정책 뿐인가. 김대중 정부 2년6개월 동안 65번째라는 장관들의 경질, 선거비용 수사 개입을 둘러싼 여야 대치와 가두시위, 국회공전, 의약 분업을 둘러싼 이익집단의 극한투쟁, 정부기금의 방만하고 불투명한 운영, 무엇보다도 도덕적 해이 등이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다.

시장의 신뢰회복을 통해 경제를 먼저 살리고 그 후에 분배.사회복지의 문제를 다루자는 논리 자체가 시행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NGO들은 정부가 제대로 하지 못하고, 앞으로 하기도 어려워 보이는 일을 반대하는데 힘을 쏟고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추진하는 왜곡된 신자유주의 정책이 성과는 작은 반면 폐해는 벌써 나타나고 있기 때문일까.

조현욱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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