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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전화번호부 발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한국통신박물관에서 보관 중인 전화번호부(1936년 제작)보다 21년 앞선 국내 최고(最古)의 전화번호부가 발견됐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찬하당 우체인(郵遞印)연구실을 운영하는 최순석(崔舜錫.58)씨는 "최근 이 전화번호부를 친척에게서 받았다" 며 5일 공개했다.

崔씨가 공개한 전화번호부는 경성우편국에서 제작, 배포해 충남 대흥면 우편소(당시 우편소장 李恒圭)에 비치됐던 것이다. 표지에는 '전화번호부 직업별' 이란 제목과 함께 '大正 4년(1915년) 4월 1일 현행' 이라 적혀 있다. 가로 13㎝.세로 19㎝ 크기로 양복 안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게 제작됐다.

1백42쪽 분량의 이 전화번호부는 경성.인천.용산 등 3개 우편국에 등록된 번호 4천여개가 관공서.관리(官吏) 등 43개 분야로 나뉘어 수록돼 있다. 관리로는 이완용(李完用).박제순(朴齊純).이지용(李址鎔) 등 친일인사가 대부분 포함됐다. 이완용의 번호는 464였다.

한일합병 때 순종에게 조약문서에 옥새를 찍으라고 강요한 윤덕영(尹德榮) 등 일부 인사는 두세개의 전화번호를 갖고 있었다.

또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손병희(孫秉熙), 흥선대원군의 수종(隨從)으로 알려진 서화가 김응원(金應元) 등의 번호가 들어 있다.

일반인 중에는 극장.양복점.직업소개소.음식점.주점 등을 운영하는 재력가와 변호사, 일본 상인들이 많았다.

당시 전화는 교환수에게 상대방 전화번호를 말해야 통화가 가능한 자석식이었다.

가입비는 경성지역은 15원(당시금 한돈쭝〓5원), 나머지 지역은 10원이었다. 1년 단위로 징수한 전화료는 경성은 72원, 나머지는 60원이었다.

또 각 전화번호는 한자리에서 네자리까지로 돼 있었다. 상대방 번호를 모를 경우 500번이나 60번으로 문의하게 했다.

한국통신박물관 최병희(崔炳憙)관장은 "다이얼 방식이 보급된 36년 이전에 전화번호부가 어떻게 구성됐는지, 가입자가 누구인지를 통해 당시 시대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 라고 평가했다.

고수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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