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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기문란’ 이유로 방아타령·춘향가 공연 금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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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1902년 야주개(현 새문안교회 부근) 봉상사(奉常司) 자리에 세워진 협률사 극장. 500석 규모의 원형극장이었는데, 최남선은 이 건물이 ‘로마의 콜로세움’을 본떴다고 썼다.1908년 원각사(圓覺社) 극장으로 바뀌었다.

1902년 고종 황제 즉위 40년 기념 예식을 앞두고 궁내부는 전국의 재인(才人)과 기생들을 불러모아 협률사(協律社)를 조직하고 야주개(현재의 서울 당주동)에 500석 규모의 원형극장을 건립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극단과 상설극장이 생긴 것이다. 흉작에 따른 재정난과 정세의 급변으로 기념 공연은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했지만, 일단 협률사로 모인 예인(藝人)들은 일반 민간인을 상대로 상업 공연을 시작했다.

이 해 12월 협률사의 공연 개시 광고문은 다음과 같았다. “본사에서 소춘대유희(笑春臺遊戱)를 오늘부터 시작하오며 시간은 하오 6시부터 11시까지요 등표(等標)는 황지(黃紙) 상등표에 1원이요 홍지(紅紙) 중등표에 70전이요 청색지 하등표에 50전이오니 완상(玩賞)하실 군자들은 알아서 찾아오시되 시끄럽게 떠드는 것과 술 취해 얘기하는 것은 금지함이 규칙임.”

이 땅에 돈을 내고 입장(入場)하는 시설이 등장한 것은 이 무렵부터였다. 백정이나 노비 출신은 출입을 금한다는 내용은 없었으니, 이 광고는 신분이 아니라 ‘돈’이 ‘자리(=지위)’를 결정하는 시대가 열렸음을 알려주는 포고문 같은 것이었다.

근대적 극장이 출현하기는 했지만, 입장료가 비쌌던 탓에 부호 자제나 한량(閑良)들이 기생이나 첩실(妾室)을 거느리고 구경 가는 정도였다. 협률사는 이듬해 공연 레퍼토리가 지나치게 속되고 탕자(蕩子)·음부(淫婦)들이 모여들어 풍속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혁파되었으나, 러일전쟁(1904~05년) 이후 부활했다. 이후 원각사·광무대·단성사·연흥사·장안사 등의 새 극단과 500~1000석 규모의 극장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신문들은 ‘지방에서는 의병 전쟁으로 울음이 끊이지 않는 시절에, 서울에서는 밤마다 노랫소리가 진동한다’고 비판했지만, 극장 출입에 맛을 들인 사람들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1910년 1월 21일, 한성 중부서는 연흥사 총무를 소환하여 앞으로 방탕한 노래와 음란한 행동은 일체 금지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연흥사의 레퍼토리는 소고(小鼓)잡이 3~4명이 함께 부르는 난봉가, 방아타령, 담바고타령, 기생과 창부(倡夫)가 어울려 부르는 잡타령, 판소리 춘향가 등이었다. 지금은 전통 연희의 정수로 인정받고 있는 것들이지만, 당대 권력의 시선에는 ‘풍기문란’으로 비쳤던 것이다. 대중문화 검열은 이렇듯 후대인이 볼 때에는 언제나 우스꽝스러운 법이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