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두만강 대탐사] 2. 강은 대륙을 열고 있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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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우리들에겐 눈보다 귀로 더 익숙한 두만강.중국에서는 투먼(圖們)강이라 부르는 이 강은 백두산 동남쪽 대연지봉의 동쪽 기슭에서 발원하는 석을수(石乙水)를 원류로 삼는다.

그리고 마천령 산맥에서 발원하는 소홍단수(小紅湍水)와 함경산맥에서 발원하는 서두수(西頭水)를 끌어안아 함께 어우르면서 우리나라에서 세번째로 긴 강의 면모를 갖춘다.

북한의 무산·회령·종성·남양과 같은 고장 사람들이 모두 두만강가를 뒤져 일용할 양식을 얻고,반두질과 그 물질로 조촐한 식탁을 꾸려왔다.고구려와 발해 그리고 조선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이 강처럼 우리 한민족의 삶의 질곡과 애환의 역사가 짙게 깔려 있는 강은 아직 없다.

그러나 우리 일행이 지나는 차창 밖으로 비치는 두만강변의 정경들은 언제나 헌옷처럼 익숙하다.구새먹은 고사목을 업어다 굴뚝으로 섬긴 세 간짜리 초가들.회칠한 흙벽에 나선형의 폭죽처럼 매달려 햇살 아래 터질 듯 익어가는 붉은 고추.이빨 가지런한 아이들처럼 까르르 웃고 있는 듯한 주황색 옥수수가 고향집 안방 벽에 걸린 흑백사진들처럼 정겹다.

신의주에서부터 시작된 압록강 여정은 하구인 단둥(丹東)에서 상류인 백두산으로 거슬렀었다.그래서 두만강은 상류에서 하구로 흐드러지는 흐름을 따르는 여정이 되었다.압록강은 계곡이 깊었지만 서해로 가기 위해 더없이 온화하였고,두만강은 압록보다 수량은 적지만,동해로 가지 위해 격렬하다.

우리 일행은 이틀 동안이나 줄기차게 내린 빗줄기로 무산(茂山)에서 멀지않은 충산(崇善)과,젖은 손수건을 던지면 대안인 회령(會寧)의 자갈밭에 떨어질 만큼 지척인 싼허(三合) 여정을 단념할 밖에 없었다.산사태로 곳곳의 도로가 막히거나 끊어져 있었던 까닭이다.

투먼(圖們) 해관에 당도한 날 아침,두만강 역시 어김없이 범람하여 자못 흥분되어 있었다.구르며 뒤척이며 굽이치는 황토색 두만강 물 머리 너머로 침수된 옥수수 밭과 북한의 남양시 건물들이 손에 잡힐 듯 선명했다.

공간적으로 강은 이 쪽과 저 쪽을 구분 짓는 경계선을 상징하는 동시에 두 공간을 연결하는 의미도 함께 담고 있다.강이 지닌 이런 격리성과 연결성은 지금 중국 동북 3성에 자리잡고 살고 있는 우리 한민족의 수효가 아직도 2백만을 헤아리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朱蒙)의 어머니 유화(柳花)는 강의 신(神)인 하백(河伯)의 딸이다.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가 그녀를 유혹하여 낳은 아들이 바로 주몽이다.하늘의 신과 물의 신이 결합함으로써 비켜날 수 없는 통치자의 모티브로 삼았다.

사실 우리 민족은 옛적부터 육로보다 수로에 익숙했었다.강상(江上)도시와 번화한 저자들이 어김없이 강가에 형성되었던 것은 강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의식과 강을 막힌 공간 아닌 열린 공간으로 여겼던 오랜 전통 때문이었다.

세 간 짜리 초가를 지어도 필경 산을 등지고 앞으로 강을 바라보는 터전을 잡은 것도 열린 공간에 대한 우리 민족의 끈질긴 염원이 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지금 두 개의 국경선을 두고 있다.하나는 한반도에 존재하는 휴전선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과 마주하는 압록강과 두만강의 경계선이다.그러나 우리는 그 경계선들이 열리고 있는 대역사의 전환을 바라보고 있다.판문점이 열렸고 경의선 철도가 놓여지고 있다.

압록강에서 만났던 뗏목꾼은 차마 뒤질세라 저 먼저 손을 흔들며 우리 일행의 안부를 물었고,두만강 강가에서 자맥질하던 하동(河童)들,빨래하는 아낙내들과의 대화에서도 지난날처럼 바늘쌈지를 입에 문 듯한 야멸찬 적대감을 읽을 수 없었다.

단둥에서 콴뎬(寬甸)으로 가는 길목인 고루자향(古樓子鄕)에서 보았던 국경 경계 표석 근처 어디에서도 눈길이 가파른 양국의 경계병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륙을 향하여 가없이 열려 있는 광활한 공간을 우리는 보고 또 보았다.‘양고기뀀집(양고기꼬치집)’‘개장집(개고기집)’‘살까기센터(다이어트센터)’‘토닭집(토종닭집)’같이 때묻지 않아 오히려 투박하고 소박한 우리말 간판들을 바라보며 우리의 여정은 다시 옌지(延吉)에서 훈춘으로 향하고 있었다.두만강 하구인 팡촨(防川)까지 내쳐 줄달음칠 작정이었다.

도중 신지춘(新基村)이란 지표석이 서 있는 억새 밭에서 도도하게 범람하는 두만강 물굽이를 바라보며 도시락을 들었다.

투먼을 떠나면서 길 왼 편으로는 사뭇 철길이 따르기 시작했고,오른 손 편으로는 두만강 물너울이 함께 해주었다.북한의 다락밭 기슭에서 익어가는 짙은 옥수수 향기가 물길을 건너 콧등에 스친다.

그리고 다다른 훈춘.발해는 일찍이 두만강 이북에 터전을 잡고 이곳의 대평원에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를 두었다.발해가 멸망한 후에는 고려의 영향 아래 있던 여진들이 이 강 언저리에서 살았다.

그래서 발해가 쌓았던 팔연성(八連城)의 성터가 이곳에 남아 있다.발해국은 이곳을 기점으로 일본이나 아라사(俄羅斯)로 가는 길목으로 삼았었다.훈춘 시가지를 관통하는 큰길은 발해국 때의 지명을 그대로 이어받은 용원가(龍原街)였다.

훈춘을 벗어나면서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평원지대가 펼쳐지는 데,그 아득하고 멀기가 김제 만경 들을 뛰어넘었다.징신(敬信)을 거쳐 주사핑(九沙坪)까지 사뭇 사구(砂丘)지대가 나타나더니,곧장 취안허커우(圈河口)에 닿는다.맞은편은 꽃게가 많이 난다는 북한의 원정리다.

호수와 늪지대는 온통 땅버들과 키꼴이 껑충한 도토리나무로 덮혀 있다.드디어 러시아 쪽에서 쳐 놓은 철조망이 길 바로 왼편으로 보인다.웬만치 상세하다는 지도를 펴보아도 기록되지 않은 솔잎같이 가늘고 뽀족한 돌출지가 동해로 기어갔는데,그 작은 땅에 북한과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선이 거미줄처럼 뒤엉켜 있어 우리들이 걸어가는 길이 어느 나라 땅인지 도무지 분별하기 쉽지 않았다.실제로 남의 땅을 빌려 길을 낸 곳도 없지 않다는 설명이었다.

드디어 답사의 종착점인 팡촨에 닿았다.압록강 하구인 단둥에서 방천까지의 여로는 줄잡아 7천리.우리들은 서울을 출발한 지 12일 만에 드디어 아득히 펼쳐진 늪지대 너머로 아침 햇살에 맨 가슴을 드러내고 누워있는 동해의 물결을 바라보았다.그리고 그때서야 우리 한민족의 애환이 서린 두만강이 동해의 발원지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동해로 흘러드는 물머리 중에서 두만강처럼 큰 강은 없다.우리가 계단을 밟아 오른 곳은 중국의 국경초소 옆인 망해각(望海閣).

나는 그때까지 그토록 사통팔달로 탁 트인 넓은 시야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토자비(土字碑)가 서 있는 늪지대 너머로 북한과 러시아의 포시에트를 이어주는 긴 철교가 하늘에 걸린 다리처럼 아스라이 바라보인다.

화물열차가 미동도 없이 그린 듯 멎어 있는 북한의 역은 내 생전 한번도 가 본 적 없는 홍의리(洪義里).우리들이 흔히 들어서 알고 있는 아오지(阿吾地)는 그 다음 정거장이다.

우리는 망해각 아래에서 도시락으로 아침을 들었다.그러나 일행 중 어느 한 사람도 진작 망해각을 떠나지 않고 줄곧 서성거리고 있었다.가없이 열려있는 동해를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다시 등 뒤에 펼쳐진 대륙을 바라본다.

우리 민족의 기백으로,그리고 우리의 끈질김으로 우리의 지혜를 함께 모은다면,우리가 가야할 길은 너무나 많이 열려 있다는 것을 그 무한대의 망해각 전망은 가르쳐 주고 있었다.

그리고 세 나라 중에서 누구의 땅에선가 느닷없이 훼를 치며 길고 긴 여운을 남기는 아침닭의 울음소리 또한 그것을 깨우쳐 주기에 충분했다.

김주영 <소설가>

사진=장문기 기자

[탐사단 명단]

◇ 국내 : 신경림(시인)원종관(강원대 교수.지질학)김주영(소설가)유홍준(영남대 교수.미술사)안병욱(가톨릭대 교수.한국사)승효상(건축가)이종구(화가)송기호(서울대 교수.발해사)김귀옥(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 연구원.사회학)여호규(전 국방군사연구소 연구원.고구려사)

◇ 현지 : 유연산(옌볜작가)안화춘(옌볜 사회과학원 연구원.독립운동사)

◇ 중앙일보 : 장문기(사진부 기자) 정재왈(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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