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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 끊이지 않는 아이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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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신이 외면한 나라’. 중남미 최빈국 아이티를 일컫는 말이다. 내전과 쿠데타·자연재해로 점철된 역사를 가졌기 때문이다. 지난 12일 수도 포르토프랭스를 강타한 지진은 아이티에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남겼다. 지진으로 집과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기도와 찬송으로 신에게 자비를 호소한다. 미국 국제현안연구소의 푸자 바티아 연구원은 15일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IHT)에 기고한 칼럼에서 “아이티인들이 자신들에게 무자비한 신에게 의지하는 건 의지할 게 하나도 없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아이티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1492년 12월 5일 상륙하며 서양과 처음 접촉을 했다. 스페인은 사탕수수·담배 재배를 위해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들여왔다. 프랑스 해적들도 해상 요충지인 아이티에 근거지를 마련했다. 두 나라는 티격태격하다 1697년 섬 서부(현 아이티)는 프랑스, 중동부(현 도미니카공화국)는 스페인이 지배하기로 했다.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자원 덕에 아이티는 카리브해의 부국으로 떠올랐다. 1789년 프랑스혁명에 자극받은 흑인들은 무장봉기해 1804년 독립을 쟁취했다. 제국주의를 몰아낸 세계 최초의 흑인 독립국이다. 독립전쟁 영웅은 황제가 돼 철권을 휘두르다 암살됐다. 이 사건은 이후 이어진 쿠데타·암살의 전주곡이 됐다.

아이티 경제가 결딴나게 된 데는 프랑수아 뒤발리에와 장 클로드 뒤발리에 부자의 실정이 결정적이었다. 1957년부터 86년까지 30년간 통치한 이들 부자는 국영 기업을 민영화하며 막대한 뇌물을 챙겼다. 살길이 막막해진 수백만 명이 도미니카공화국뿐 아니라 미국·캐나다 등으로 유입됐다.

부패와 정정 불안, 연이은 자연재해는 아이티 경제를 파탄시켰다. 인구의 75%가 하루 2달러(약 2200원) 이하로 산다. 22만5000명 이상의 어린이가 남의 집에서 노예처럼 일한다. 가난한 어린이들은 진흙에 물·소금·마가린을 섞어 만든 진흙과자를 먹는다. 해외 원조는 이 나라 재정의 30~40%를 차지한다. 뉴욕 타임스(NYT)는 14일 사설에서 “미국과 국제사회는 지진 피해 구제에 그쳐서는 안 되며, 아이티가 극심한 가난과 절망·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재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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