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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콩트] 무엇이 어른을 아이로 만드는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지긋지긋한 고속도로를 벗어나 눈에 익은 국도로 접어든 후에야 비로소 아빠의 얼굴에 웃음기가 되살아나기 시작했어요.평소보다 몇 배나 더 많은 시간을 들여 거의 전쟁을 치르다시피 고생고생 귀성길을 달려오는 동안,지칠 대로 지친 아빠의 입에서는 줄곧 불평불만이 떠날 새가 없었지요.

"또다시 자가용 끌고 귀성하면 그때는 내 성을 간다!"

명절 귀성 때마다 입버릇처럼 항상 토해내는 우리 아빠의 맹세랍니다.하지만 맹세대로 했다면 아빠는 벌써 성을 여러 번 갈고도 남았을 거예요.

명색은 녹색 면허증이지만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장롱 면허증 소유자인 엄마는 장시간 혼자서 운전을 도맡은 아빠가 신경질을 부릴 적마다 아무런 도움도 못 되는 미안함 땜에 어쩔 줄 몰라 했어요.

"저기가 바로 아빠가 어렸을 적에 동네 친구들이랑 홀랑 빨가벗은 채 멱도 감고 물고기도 잡으면서 놀던 곳이란다."

아빠는 고향 마을 근처 다리 위에 잠시 차를 세운 다음 그 아래 냇물 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어요.이제부터 아빠가 어디를 가리키며 어떤 추억담을 또 들려줄 것인지 나는 훤히 다 알아맞힐 자신 있어요.

물론 귀성 때마다 이미 여러 차례 되풀이해서 이야기를 들은 탓도 있을 거예요.하지만 아빠의 추억담에 내가 전혀 감동을 못 느끼는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재덕리 그곳이 다만 아빠의 고향일 뿐 내 고향은 아니라는 데 있지요.

애당초 내겐 재덕리에 묻어놓은 나만의 추억거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아빠와 함께 나누어 가질 만한 추억거리도 없는 셈이니까요.

"윤석이네는 지금쯤 와 있을까요?" 거기가 재덕리임을 알리는 우람한 느티나무의 모습이 멀리 보일 무렵이었어요."우리하곤 길이 다르니까 벌써 도착했을지도 모르지."

"아주버님은 이번에 오실까요?" 작은집 식구들을 말할 때만 해도 멀쩡하던 아빠의 표정은 엄마가 큰아버지를 들먹이는 순간 어둡게 변하고 말았어요.

"형님이라도 애들 데리고 오셨으면 좋겠는데......"

"자기 남편이 그 지경인데 무슨 재미로 형수님이 여길 찾아오시겠어!" 아빠의 핀잔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엄마가 차의 앞유리 쪽을 향해 목을 길게 빼면서 소리쳤어요.

"저기 나무 밑에 서 계시는 저분, 아버님이 맞지요?" 할아버지가 틀림없었어요. 동구 밖 느티나무 밑에서 할아버지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거예요.

차 안에서 손을 흔들어대는 우리를 발견하고 할아버지가 먼발치서부터 양팔을 활짝 벌린 채 잰걸음으로 다가오시기 시작했어요.

"내 강아지들 왔구나!" 할아버지는 우리를 보자마자 대뜸 등부터 돌려대시는 거예요.키재기는 매번 할아버지와 우리 사이의 만남을 기념하는 중요한 행사의 하나거든요.그러고 보니 아버지의 고향 재덕리에 묻힌 어린 시절의 추억거리 하나가 내게도 있긴 있었던 셈이네요.

키재기의 결과에 만족해 하면서 할아버지는,요즘 혹시 학교에서 그 왕따라냐 뭣이라냐를 당하지나 않는지를 나와 석이에게 물으시고,요즘 경제 사정이 좋지 않다는데 다니는 회사는 괜찮은지를 아빠에게 물으셨어요.

"모두들 별탈 없이 지냈다니 참말로 다행이구나.다들 험헌 세상 험헌 싸움에서 안 자빠지고 용케도 살어남은 역전의 용사들이다." 우리의 대답을 듣고 나서 할아버지는 한층 더 만족해 하시는 거예요.

"집에서 기다리시잖고 왜 여기 나와 계시는 거예요?"

"아니다.너 기다리느라 그런 게 아니라 잠깐 볼일 보러 마실 나왔던 참이다."

기다리지 않았다는 할아버지를 상대로 아빠는 살인적인 귀성 전쟁에서 겪었던 갖가지 무용담을 과장까지 섞어가며 장황하게 늘어놓기 시작했지요.할아버지 앞에서 아빠는 어느새 응석받이 어린애로 변해 있었어요.

"먼길 오느라 고생들 많었다.어서 들어가 편히 쉬거라." 함께 들어가시자는 엄마와 아빠의 제의를 뿌리치고 할아버지는 동구 밖에 혼자 남으셨습니다.자동차 소리를 듣고 할머니가 대문 밖으로 달려 나왔습니다.

"오다가 아부지 못 봤냐?"

"볼일이 남아 있다시면서 나중에 들어가시겠다고…."

"볼일은 무슨!아침나절부터 내둥 느티나무허고만 동무허고 지내는 양반이…."

예상했던 대로 작은집 식구들은 우리보다 먼저 내려와 있었지요.그리고 또 예상했던 대로 큰집 식구들은 아무도 안 보였습니다. 우리 엄마 아빠와 작은아버지 부부가 한곳에 모여 한바탕 쑥덕공론을 벌였습니다.

큰아버지 문제로 의논하는 눈치였어요. 큰아버지는 은행 통폐합에 따른 구조조정 때 명예퇴직을 한 후 퇴직금을 투자해서 대리점 사장이 되었다가 사기 사건에 말려들어 남의 빚을 몽땅 뒤집어쓰고는 부정수표단속법 위반인가 뭣인가로 수배 중인 몸이었지요.

큰어머니는 빚쟁이들 등쌀에 못 견뎌 사촌오빠와 언니를 데리고 친정 쪽으로 피신해 있어 우리하고 연락조차 안 되는 형편이었고요.

할아버지는 줄곧 밖으로만 도시다가 날이 어두워진 다음에야 수심에 찬 얼굴로 들어오셨지요. 큰아버지는 밤이 깊도록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셨고요.도무지 말이 없는 가운데 오지 않는 큰아버지를 기다리는 일로 추석 전야를 보내다가 우리는 밤이 깊어서야 늦은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새벽 두세시쯤 되었을까요.방문 밖의 시끌짝한 소리에 놀라 얼핏 잠에서 깬 나는 옆에 정신없이 곯아떨어진 사촌을 마구 흔들어 깨웠어요.

"압지,엄니,저구만요!불효자 창수가 돌아왔구만요!"

참으로 놀라운 광경이 마당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어요.그토록 의젓하고 당당하게만 보이던 큰아버지는 간 곳 없고,그 대신 웬 꾀죄죄한 행색의 남자가 자기보다 훨씬 몸집이 작은 할아버지의 품에 그 커다란 덩치를 떠맡긴 채 어린애처럼 엉엉 울고 있는 거예요.

아버님,어머님이라고 평상시에 깍듯이 높여 부르던 호칭마저도 어느새 어린애의 말투로 바뀌어 있더라니까요.

"자수하기 전에 압지,엄니 뵙고 하직 인사 올릴라고 이렇게 찾어왔구만요."

"오냐,잘 왔다.요렇게 안 죽고 살어 돌아와 줘서 참말로 고맙다."

오랜 도피 생활에 지친 초로의 아들을 껴안고 할아버지는 연방 등을 쓰다듬으며 고맙다는 말을 수없이 되뇌고 계셨어요.

"애비야, 너는 역전의 용사다.역전의 용사가 전쟁터에서 안 죽고 살어남은 건 절대로 부끄런 일이 아니다.돌아와 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한바탕 또 허겁스레 울음보를 터뜨리는 큰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어른들이 어째서 명절 때만 되면 그처럼 만사 제쳐놓고 죽자사자 고향집을 찾아가려 하는지 그 이유를 대강은 알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늙은 부모가 지키는 고향집은 이를테면 밖에서 뺨맞은 아이가 돌아가 억울함을 호소하고 슬픔을 위로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겠지요.

우리 아빠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거예요.오랜 타향살이에 쫓겨 이리 얻어맞고 저리 걷어채며 서럽게 지내다가 때가 되면 만신창이가 된 영혼과 육신을 이끌고 찾아가 상처를 치료받고 멍자국을 풀 수 있는 바로 그곳,노부모가 기다리는 고향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피난처 아닐까요.

그런데 어른들 세대와는 달리 애당초 고향을 못 가진 채로 자라난 우리들 세대,석이와 나는 요담에 세상에 부딪히고 깨져 만신창이가 될 경우 어느 피난처를 찾아가야 되는 걸까요.

윤흥길 <소설가.호서대 교수>

<윤흥길은…>

1942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돼 등단했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완장' 으로 널리 알려진 윤씨는 판소리 사설같이 낭창하고 능청스런 문체로 삶의 부조리를 후련하게 드러내는 작가로 정평이 났다.

대표작으로는 '장마' '꿈꾸는 자의 나성' '밟아도 아리랑' '산에는 눈 들에는 비' '산불' 등이 있으며 현대문학상.한국창작문학상.21세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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