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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군 정예 1500명, 조국에서 쫓겨나다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일본군에게 격추 당한 미군 조종사(앞줄 가운데)를 구출한 뒤 환영연을 베푼 조선의용군 전사들. 1945년 3월 4일 산시(山西)성 신수이(沁水)현 궈좡춘(郭庄村). 김명호 제공


20세기 초 한국인들은 식민지 백성으로 전락했다. “아예 이 땅을 떠나자”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강 하나만 건너면 중국이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국경을 넘었다. 엉뚱한 행동으로 모두를 욕되게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당당하게 중국 현대사의 한 부분을 장식해 아직도 중국인들을 숙연케 하는 유명·무명의 한국인들이 있었다. 한 예가 조선의용군이다.

1945년 8월 16일과 18일, 이범석이 지휘하는 광복군 국내정진군은 국내 진입을 시도했다. 미군 군용기를 얻어 타고 시안(西安)을 출발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첫 번째는 중도에 회항했고 두 번째는 여의도에 착륙은 했지만 일본군의 저항이 완강했다.

북쪽에서도 좀 복잡하지만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소련의 대일본 선전포고 사흘 후인 8월 11일, 옌안(延安)의 조선의용군 사령부는 각 지역에서 활동 중인 조선의용군을 선양(瀋陽)에 집결토록 했다. 제일 먼저 도착한 조선의용군 선발대는 선양에 거주하던 한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한청(韓靑)이라는 인물이 창설한 조선의용군 독립단과 합류해 조선의용군 선견종대를 편성했다.

일본 관동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동북을 장악한 소련은 10월 초에 들어서자 중국 국민당과 소련군의 철수를 협의하기 시작했다. 국민당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선양의 소련군 사령부는 옌안에서 올 후속명령을 기다리던 조선의용군에 농촌 지역으로 이동해 줄 것을 요구했다. 소련군의 독촉이 심하자 의용군지휘부는 15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남만주 방면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조선인 밀집지역인 단둥(丹東)·환런(桓仁)·퉁화(通化)가 있었다. 지휘는 지역 사정에 밝은 한청이 했다. 10월 11일 오전 단둥에 도착하자 강 건너 신의주에 주둔하던 소련군 사령관이 연락병을 보냈다. “내일 아침 압록강 어귀에서 만나자.”

신의주 주둔 소련군 사령관은 조선의용군의 입국을 요구했다. 한청은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소련군 사령관의 첫마디는 한청의 귀를 의심케 했다. “귀하가 인솔하는 부대는 왜 강을 넘어 조선 경내로 들어오지 않는가” “진입이 가능한가”라며 되물었지만 “조선인 부대가 아니냐. 불가능할 이유가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래도 믿기지 않았던지 재차 확인했다. 대답은 한결 같았다. “허락만 한다면 12시 정각에 도강하겠다”며 즉석에서 결정을 내렸다.

조선의용군이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에 진입하자 소련군은 “포츠담 선언에 의해 소련군과 미군을 제외한 모든 무장부대는 한반도에서 무장을 해제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별꼴을 다 보겠다”며 버텼지만 소련군은 막무가내였다. 말끝마다 국제협약을 거론했다. 무장을 해제 당한 조선의용군은 울화통이 터질 노릇이었지만 맨손으로 훈련을 계속했다.

김일성은 한청을 만나기 위해 88여단 출신 안길을 신의주에 파견했다. 평양에서 국내의 민족지도자 조만식과 함께 한청을 만났다. 한청은 조선의용군 처리에 관한 의견을 제시했다. 해방된 조국에서 국방의 임무를 수행하게 해달라는 내용들이었다. “조선의용군 선견종대를 주축으로 군관학교를 설립해 군 간부를 양성하자. 국경 경비를 우리에게 맡겨라. 보안대도 가능하다. 실행이 불가능하다면 다시 동북으로 돌아가 따로 군대를 만들겠다.”

김일성은 동북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권했다. 조만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김일성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소련에서 갓 귀국한 김일성은 국내 기반이 공고하지 못했다. 완전 무장한 조선의용군 1500명은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었다.

국내에서 활동하던 민족세력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간 누렸던 자신들의 지위가 중국에서 밀어닥친 세력들에 의해 위협받기를 바라지 않았다.

한청은 김일성의 요청을 수락했지만 미국이나 국민당 정부와의 마찰을 우려한 소련은 허락하지 않았다. 중공을 통해 소련에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겠다는 한청의 강력한 항의가 있은 후에야 조선의용군의 무장 회복과 동북으로 돌아가는 것에 동의했다. 조선의용군 선견종대는 무기를 돌려받고 소련군이 일본군으로부터 취득한 장총 500자루와 따발총 20정까지 챙겨 들고 선양으로 돌아왔다.

중국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인 항일전쟁 시절 화북·화중·화남 일대를 누비며 온갖 전투로 단련된 조선의용군은 조국에서 쫓겨났다.(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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