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향 장기수 삶 기록한 '…지상에서 가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설마 그러랴만 만약 그리는 영상들을 지금 그렇듯이 망막에 거미줄을 친 채 만약에 만약에 죽어도 눈을 못 감는다면…. 또 만약 동강난 산천을 부둥켜 안은 채 만약에 만약에 터도 없는 무덤이 되고 만다면…. 아 설마가 사실일 날이 내일일지도 모르니 만약 그렇더라도 지금 그렇듯이 비겁하지 말고 어리석지도 말고 죽음이여! 담담하라. 미소지어라!"

최고령 비전향장기수 중의 한 사람인 이종(89)씨가 쓴 '설마' 란 산문시의 일부다.

삶과 죽음에 맞서는 비장함을 어찌 이보다 더 진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자신의 이념을 끝내 꺾지 않겠다는 의지, 동강 난 조국에 대한 사랑이 절절하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제목만 봐도 이 책의 성격을 간파했을 것이다. 0.75평은 감옥 독방의 크기인데, 기실 물리적인 집의 공간 개념으로 본다면 지상에서 가장 작은 방임에 틀림없다.

이 공간에서 30~40년 이상을 수형생활로 보낸 비전향 장기수들의 고행의 기록이 바로 이 책이다.

저자 7명(김선명.신인영.김석형.조창순.홍경선.이종환.이종)의 사상적 경향에 대한 독자 개개인의 입장은 정말로 각자의 판단에 맡길 일이다.

그러나 그런 이념의 색안경을 한번 벗어 던지고 인간 그 자체로 이들을 들여다 본다면, "고전적 순정과 인간 실존의 지조" 라는 시인 고은의 표현에 공감 못할 바 아니다.

저자 각각의 기록을 모은 이 책에는 성장과정과 붙잡히게 된 동기, 그 이후의 감옥생활 등이 공통적으로 담겨있다.

오랜 설득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전향을 거부한 이유는 단 하나.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상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이다.

1965년 이른바 '통일사업' 을 위해 남파됐다 붙잡혀 30년 넘게 감옥에 있었던 홍경선(75)씨는 "변절한다는 것은 양심을 파는 것과 동시에 동지를 파는 것" 이라고 썼다.

홍씨가 옥중 편지를 통해 김성희란 여대생과 부녀의 인연을 맺는 사연은 휴머니즘의 입장에서 콧등이 시큰한 대목이다.

이밖에 가족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한 채 혼자 살고 있는 이종환(78), 90세가 넘은 노모와 동반 북송을 원하는 신인영(71), '총각 할아버지' 김선명(75)씨의 사연도 가슴 아리기는 마찬가지다.

어쨌든 시대는 달라졌다. 다음달 2일 이종씨 등 비전향장기수 63명이 북한 땅으로 떠난다.

지난 6월 열린 남북 정상회담의 합의에 따른 조치다. '사상의 조국' 을 언급하는 그들의 발언이 시대착오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이 책은 파행의 현대사, 그리고 현재 치유 중인 현대사를 되짚어 보기 위한 텍스트로서 어느정도 가치는 있다.

정재왈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