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국가는 언론 통폐합의 피해 구제 조치 취하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역사는 무섭다. 진실은 언젠가 드러나고, 바로잡힌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1980년 언론통폐합을 조사·결정해 어제 기자회견으로 발표했다. 신군부는 온갖 구구한 명분으로 합리화해왔지만 어제 발표로 얼마나 강압적이고, 불법적인 만행이었는지 드러났다. 늦게나마 정부기구가 진실을 밝히고, 바로잡을 것을 권고하고 나선 것은 역사 바로잡기의 한 과정이라고 평가한다. 특히 중앙일보는 동양방송(TBC)을 강탈당한 언론 통폐합의 가장 큰 피해 당사자로서 감회가 남다르다.

언론 통폐합은 언론 발전은커녕 오로지 신군부의 정치적 야욕을 위한 횡포였다. ‘1980년 신군부가 집권 방안을 검토하면서 집권에 장애가 될 수 있는 언론을 조정·통제…’하기 위해 ‘언론사 통폐합을 단행’했다는 게 진실화해위의 결론이다. 그러니 통폐합 대상 언론사도 ‘친(親)정부 성향 여부, 특정 정치인과의 친소(親疏) 관계 등’을 따져 선정한 것이다.

가장 분명해진 것은 강압성이다. 당시 보안사는 일부 언론사주를 불러 언론사 포기 각서를 요구하면서 ‘군인이 권총 등을 휴대하거나 착검해 위협했다’고 진실화해위는 발표했다. 또 각서 제출을 거부하면 ‘국세청과 감사원을 통한 세무사찰 및 경영 감사’를 통해 불이익을 주겠다고 위협했다고 한다. 동양방송을 빼앗길 때의 공포 분위기를 기억하고 있는 중앙일보로선 이번 조사 결과가 매우 사실에 근접했다는 점을 평가한다. 피를 보며 정권을 빼앗은 쿠데타 세력이 총칼로 협박하는데 누가 감히 거부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위협 속에서 공소시효를 운위하는 것도 한가하다.

그뿐 아니다. 언론사와 개인의 재산을 환수, 기부채납하게 하면서 기자재 값만으로 산정한 가격을 수용하라고 강요했다고 진실화해위는 확인했다. 영업권과 방송 허가권 등 무형의 자산에 대해서는 어떤 보상도 하지 않았다. 공권력을 내세워 사유재산을 강탈하는 나라에서 무슨 자유와 시장경제를 말할 수 있겠는가. 과정은 잘못됐으나 보상은 충분히 했다며 재론을 거부해온 일부 신군부 비호세력의 변명이 얼마나 구차한 사실 왜곡인지 다시 한번 확인됐다.

신군부 세력은 가증스럽게도 언론 통폐합이 언론자유를 위한 조치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미디어산업의 미래에 대한 비전은커녕 언론에 대한 조그만 이해조차 없었다. 오로지 언론을 길들여 정권 장악의 선전대로 이용하려는 욕심뿐이었다. 그때 그런 폭압적인 정권의 횡포가 아니었다면 방통융합시대는 훨씬 다른 조건에서 맞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절대권력이 사유재산을 빼앗는 환경에서는 투자를 기대할 수 없다. 더구나 통폐합의 명분을 위해 미디어에 대한 투자는 철저히 통제했다. 글로벌 미디어 시대로 들어서는 시점에서 보면 안타깝기 그지 없는 일이다.

언론을 장악하려는 시도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계속돼 왔다. 하지만 어떤 정권도 언론을 영원히 장악할 수는 없다. 권력이 언론을 핍박해 자유를 빼앗고, 좌지우지하는 것은 그 정권을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 다시는 이런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도 언론 통폐합에 대해 철저한 진상조사가 이뤄져야 한다. 진실화해위는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고, 관련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하고, 피해를 구제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진실화해위의 권고는 당연하다. 정부는 이제라도 구체적인 구제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다각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물론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국가권력이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을 책임은 결국 정부에 있다. 정치권과 사회 각계의 의견을 수렴해 어떻게든 실효성 있는 방안을 찾아내는 것이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