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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시평

'좌파 정부'의 경제정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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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일부 보수세력과 기업인들이 현 정권을 두고 '좌파 정부'라고 부르자 이해찬 총리가 발벗고 나섰다.'우리는 결코 좌파 정부가 아니다. 자꾸 그러면, 좌시하지 않겠다'는 것. 맞는 말이다. 현 정권은 좌파가 아니다. 과거에 비해 '좌편향적'이기는 해도 좌파 정부의 기준을 충족하는 것은 아니다. 좌파 냄새를 풍기는 정책이 있다면 종합부동산세.출자총액제한제도, 그리고 한창 손질 중인 신문법과 방송법이 고작일 것이다. 현 정권의 정책 초점은 합리성과 투명성 증진, 독과점 폐단 축소, 시장경제 기반조성에 맞춰져 있다. 정부는 머지않아 반드시 성장효과를 낼 것이기에 당장 '전환의 비용'을 치르더라도 할 것은 하겠다는 입장이다. 정책 내용으로는 전적으로 우파적 발상이다. 그럼에도 좌파 소리를 듣는 이유는 '기득권층을 적대시하는 정치적 레토릭'과 '체감경기를 무시하는 희망사고' 때문이다.

현 정권, 좌파로 보기 힘들어

전자는 자주 거론되었기에 재론할 필요가 없다. 후자는 이 시점에서 중요하다. 현 정권의 정책사령탑을 맡고 있는 이정우 실장은 지난 9월 학술회의에서 현 정권만큼 억울하게 비난받는 정권도 없음을 지적하고,"구름에 가린 달처럼 언젠가 공적을 인정받는 날이 올 것"이라는 전망을 덧붙였다. 그랬으면 좋겠다. 아니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희망사고'라는 점과, 경제정책에는 '물꼬를 막는 일'과 '트는 일'이 동시에 추진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구제도의 폐단을 바로잡아 물이 깨끗해지긴 했으나, 새 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출구가 마련되지 않았다. 부동산대책이 전형적이다. 집값 억제에는 성공했으나 그나마 내수를 지탱하던 건설경기를 죽였다. 천도 계획과 공공사업 확대로 썰물처럼 빠져나간 투자수요가 되살아날지는 모르겠다. 수출호조가 내수로 연결되지 않는 탓을 세계경제의 구조변화로 돌리는 것은 무책임하다.'원래 그래야 하는데, 이상하다'고 폐업 직전인 기업인과 상인들에게 설명해봐야 돌아오는 것은 울화뿐이다.

청와대가 선호하는 경제통계는 서민들이 느끼는 체감통계치가 아니다. 청와대는 대기업의 부채비율, 산업생산액, 기업의 수익성과 성장성이 모두 개선되었음을 들어 경제위기를 강하게 부정한다. 대통령도 그랬다.'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한국의 성장률이 높은 편이다'라고. 그러나 잠재성장률이 하락하고 있다. 서민들의 체감경기는 급락하는 소비지표와 직결된다. 평균소비성향과 도소매판매율 하락, 국내투자수요 급락, 설비투자 감소 등이 그것이다. 청와대의 낙관론이 서민들에게 비관론이 되는 이유는 '희망사고'는 제쳐놓고 '전환의 비용'이 서민 가계를 위협할 정도로 너무 크고 전망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침체가 2년 넘게 계속되었다면 '정책실패' 얘기가 나오지 않는 게 이상하다. 청와대의 확신과는 달리 현실이 따라주지 않는'종이 위의 정책'(policy on the paper)이라고 할까.

좌파정책의 예를 들면 이렇다. 1990년대 중반 경기침체에 시달리던 스웨덴 사민당은 소비진작 조치로 은행대출금을 생활지출비에 포함시켰다. 대출금을 생계비로 인정하면 납세액이 그만큼 작아져 소비가 늘어난다. 그 결과 내수가 살아났고, 경기회복이 이루어졌다. 한국도 주택대출금을 공제항목으로 인정하지만, 공제율이 너무 작다.

정책 실패 얘기 안 나오는 게 이상

더 중요한 사실은 사민주의 스웨덴이 친기업정책으로 유명하다는 점이다. 기업은 고율의 세금을 내지만, 기업활동에서는 적극적 자유를 누린다. 수요를 관리해 노동력을 흡수하는 이른바 케인스주의를 '거꾸로' 적용한 '작은' 정책혁신이었다. 공급(노동시장)을 조직해 기업수요(경영)에 맞게 제공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예를 들면, 노조와 정부는 사회협약을 통해 '임금양보'와 '생산성연합'을 조직하고, 기업은 이윤창출과 경쟁력제고에 힘쓴다. 임금부족분은 기업이윤에서 충당하는 복지정책으로 보완한다. 이런 '역(逆)케인스주의적 발상'이 '친기업+친노동' 정책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우파 정부는 소비와 노동을 '시장에 맡기고', 좌파 정부는 소비와 노동을 '조직한다.' 그러니 좌파도 아닌 정부가 좌파 얘기를 듣는다면 영광으로 생각할 일이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