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고립의 시간을 떨치고 싶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그들은 그들이 아니었다.어머니고 아들이며,아버지고 딸이며,자매고 형제였다.흐르는 세월을 어쩌지 못해 주름은 패이고 목소리는 갈라졌어도,그 세월 만큼 그리움이 더욱 깊어진 이들.그들을 보면서 나도 운다.세월도 약이 되지 못하는 그리움이 있구나,세월이 흐를수록 가슴에 피멍이 드는 그런 이별이 있구나...

***이념으로 봉쇄된 대륙길

사람이 만나야 하는 가장 절실한 이유는 보고싶다는 마음이다.만나면 순수해지고 헤어지

면 넋이 빠지는 그런 사람을 보지 못하고 어찌 삶이 가벼워질 수 있을까.짙은 그림자가 생기지 않을 수 있을까.

사실,나이 들면 자식은 부모의 품을 떠나 독립해야 하고,형제자매는 흩어져서 각자 살아야 하는 것이다.서로 잘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만 있다면,어려울 때 조금씩 도와줄 수만 있다면 백두산 자락과 한라산 자락이 뭐 그리 먼 거리겠는가.저렇게 절박한 눈물을 토해내는 것은 자연스런 독립이 아니라 부자연스런 찢어짐이었기 때문이며,찢어짐의 상처를 처매줄 수 없는 이상한 거리에서,지도로 측정할 수 없는 거리에서 살아 왔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맘놓고 만날 수 있는 거리여야 한다.죽었는지,살았는지,사는 형편은 어떤지 알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좀 못살면 내 형제가 아닐건가.나와 다른 체제 속에서 살았다고 내 자식이 아니겠는가.소식을 몰라 질식할 것 같은 사람들은 체제에 앞서,사상에 앞서,경제적 능력에 앞서 함께 살 수 있는 사람들이다.

사정없이 세월이 갔어도 함께 만나 눈물로 공명하는 우리는 함께임이 힘이 되는 사람들이

다.작은 나라일수록 주권국가로서 자존심을 지켜야 한다는 북의 정신,그리고 남의 자본과 기술이 만나면 그 힘의 시너지 효과는 대단하지 않겠는가.

이 분위기를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스티븐 보츠워스 주한미대사는 통일한국의 등장은 세

력 균형의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동북아는 미국의 사할적(Vital) 이해가 걸린 곳이지만 이제 미국이 한반도에서 지배적 국가가 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고. 상당히 우호적인 입장이지만 말을 바꾸면 여지껏은 미국이 한반도의 지배적 국가였다는 말이 된다.

‘서울에서 평양까지 택시요금 오만원’인데 긴 세월을 돌고 돈 것은'우리는 우리'라는 당연한 명제를 놓치고 살았기 때문 아니었을까.그랬기에 미국을 종주국처럼 모시느라 자주를 잃어버린 남측은 협상대상이 아니라고,미국과 얘기하면 남측은 따라온다고 하는 기막힌 대접을 받아왔던 것 아닐까.통미봉남(通美封南)은 잘못된 것이었지만 최종결정을 할 수 있는 당당한 협상대상이 아니라는 인식의 빌미를 준 것은 우리가 반성해야 할 부분이었다.

물론 강대국의 사할적 이해가 걸린 땅,한반도를 향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 주변4강을 무시해서는 안되겠지만 이제 한반도의 노는 반드시 우리가 저어가야 한다. 주변은 주변이어야지 주변이 중심이 되면,한반도는 중심이 된 주변들의 놀이터가 될 테니까. 그 놀이터에서 우리는'오히려'통일이 성가신 사람들,민족을 외면하면서 외세를 엎고 지켜온 기득권자의 논리를 배우면서 한편에선 이상한 적의와 다른 한편에선 체념적인 눈물에만 익숙해질지도 모르겠다.빨갱이가 될까봐,반동분자가 될까봐.그 증거가 판문점 아니었겠는가.

***우리 미래는 우리 손으로

열강의 각축의 증거인 판문점은 그대로 남겨 역사의 증거로 삼고 경의선이 복구될 모양이

다.김대중 대통령은 경원선 복구까지 전망한다.우리만이 우리를 지킬 수 있다는 인식이고,우리는 우리가 지켜야 한다는 의지로 믿고싶다.그 열차를 타고 북한에 가고 싶다. 북한을 거쳐 대륙으로 뻗고 싶다.섬도 아니면서 체제와 이념 때문에 섬으로 고립되어 비행기를 타지 않고는 다른 대륙으로 건너갈 수 없었던 그 고립의 시간들을 보내고 싶다.

그래서 나는 기도한다.참담하기까지 한 간곡한 눈물을 쏟아내고 다시 돌아가야 하는 사

람들이 캄캄하고 막막해지지 않기를,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기를. 그 희망 속에 우리 민족의 미래가 있으므로.

이주향(수원대 교수·철학과)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