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화랑가의 1급 비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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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유경채 5주기 추모전. 2000.8.16~9.15. 금호미술관. ' 이달 초 발간된 '월간미술' 8월호 첫 페이지에 실린 광고다.

고인은 국전 제1회 대통령상 수상자이자 우리나라 추상미술 운동의 선구자로 꼽히는 거목. 이번 전시는 생전에 개인전을 한차례 밖에 열지 않았던 그의 첫 추모전이다.

구상에서 반추상을 거쳐 순수추상에 이르는 작품의 변천과정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뜻깊은 기회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미술관측은 개막 2주일 전에 행사를 취소해야 했다. 작품을 고루 갖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정아 큐레이터는 "1950~60년대의 구상, 반추상 계열은 공공미술관들에서 빌려온 7점이 전부다.

소장자를 숨기는 풍토 때문에 더 구할 수가 없었다" 고 씁쓸하게 토로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80, 90년대의 미술시장 호황기에 몇몇 화랑에서 개인들에게 주로 팔렸다. 해당 화랑들에 "비밀을 유지할테니 구매자를 알려달라. 아니면 우리 대신 작품을 좀 빌려와 달라" 고 요청했지만 허사였던 것.

미술품의 구매자.소장자 명단은 업계의 1급비밀이다. 무엇보다 고객들이 신분노출을 꺼린다.

"무슨 돈이 그렇게 많아서…" 라는 무언의 사회적 눈총 때문이다. 직원들이 "우리한테는 수당 몇천원도 안 올려주면서 웬 미술품이냐" 고 따질까봐, 세무서에서 "너 그렇게 부자냐. 세금은 제대로 냈어□" 하고 조사할까봐 겁난다.

화랑이 고객의 비위를 거스르기 어려운 것은 물론이다. 고객을 숨기는 것은 영업비밀을 지키는 방편도 된다. 누가 명품을 소장하고 있는 게 알려지면 여러 곳에서 달라붙기 때문이다. "그동안 값이 많이 올랐으니 파시죠. 용돈 쓰시고 앞으로 유망한 작품을 두어점 사두는 게 이익입니다. " 2억원짜리 한점을 중개하면 수수료 2천만원이 떨어진다. 인사동 초소형 화랑들의 생존비결은 대부분 여기에 있다고 한다.

화랑이 숨기고 고객이 감추니 무슨 작품이 어디에 있는지 알기 어렵다. 공공미술관의 컬렉션이 턱없이 빈약한 상황에서 개인 소장자의 비중은 크다. 힘들여 소장자를 찾아내도 빌려준다는 보장이 없다. 그 결과 질높은 기획전을 보기가 어려워진다. 몇해 전 '한국근대미술의 여명' 전이 일제시대의 대표적인 천재화가 이인성을 제외하고 열렸던 것이 그 예다.

미술사도 제대로 정리하기 어렵다. 실물을 보지 못하고 작가나 작품을 연구할 수 있겠는가. 대표적인 생존작가의 중요 작품 제작연도가 미정인 경우까지 있다. 박서보의 묘법(描法)시리즈가 시작된 것이 67년이냐 73년이냐 하는 논쟁이다. 이는 한국적 미니멀리즘을 주도한 작가가 누구냐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제작연도와 이름을 서명한 초기작 몇점만 찾아내면 간단히 해결될 사안이다. 그러나 소장자들이 나타나지 않아 아직도 미해결이다.

이같은 현상의 배경에는 미술품은 부자들을 위한 사치품이라는 부정적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게다가 우리 사회는 부자가 존경받지 못하는 특이한 자본주의 사회다. 하지만 미술품을 구입, 소장하는 행위는 예술가들의 창작행위를 후원하는 일이기도 하다.

투기나 낭비가 아니라 문화적인 용도에 돈을 쓰는 부자는 칭찬받아야 한다. '남보다 더 창의적이고 성실해서 번 돈이냐' 를 따지지 않고 말이다. 그래야 미술창작도 활발해지고 대중이 좋은 전시를 접할 기회도 많아진다.

조현욱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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