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덕담 ‘한국 정치가 동아시아 정치의 희망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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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그래도 한국 정치에서 희망을 본다. 새해 벽두부터 이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린가? 국회가 엊그제 새해 예산안 처리 과정에서 연출한 개탄할 모습을 못 본 것도 아닐 것이고, 한국 정치를 옭아매고 있는 정당 간, 정파 간, 계층 간, 지역 간, 세대 간의 깊고 깊은 갈등 구조를 모르는 것도 아닐진대 도대체 무슨 희망이 보인다는 말인가?

해외에 있는 필자라고 한국 정치의 구조적 모순과 잇따른 파행에 대해 어찌 할 말이 없으랴만 그래도 새해 벽두인지라 덕담 차원에서 긍정적인 측면을 짚어보고자 한다.
한국 정치가 희망적이란 것은 주변 경쟁국들과 비교했을 때 확연히 드러난다. 일본은 지난해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뤘다. 사실상 54년간 지속된 자민당 일당독재는 “일본이 과연 민주주의 국가인가”라는 의구심이 들게 할 만큼 퇴행적이었다. 그 결과는 20년 가까이 지속되는 두 개의 ‘잃어버린 10년’이다. 민주당이 집권했지만 과연 일본 정치에 새 비전을 제시해 줄 수 있을지, 수권정당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그러나 일본 정치의 미래가 절망적인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침체된 일본을 개혁할 이념과 정치세력이 우경화될 대로 우경화된 극우에서만 배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냉전 이후 일본에서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사회당과 공산당 등 좌익 정당들은 몰락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극우의 논리가 황당하다. 그들에 의하면 일본이 침체된 것은 미국이 강요한 ‘평화헌법’이 ‘일본 정신’을 억압하면서 일본을 ‘비정상 국가’로 만들었기 때문이란다. 일본이 다시 일어서려면 말살된 일본 정신을 되살려 ‘정상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정상 국가란 미국에 ‘노(No)’라고 할 줄 알고, 군사력을 보유하고 마음대로 행사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갖춘 나라로 요약된다. 그렇기에 총리를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은 A급 전범자들을 포함한 전몰자들의 위패가 봉안돼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야 하고, 독도와 북방 4개 도서 등 패전 후 소위 빼앗긴 영토를 ‘수복’해야 한단다.

중국 정치의 현실 또한 밝지 않다. 물론 중국의 정치체제를 은근히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과거의 일본 자민당처럼 중국 공산당의 일당독재가 제공해주는 정치 안정 때문에 눈부신 경제 발전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발독재’의 효력은 분명 놀랍다. 그러나 지금 같은 속도로 국민소득이 증가한다면 중국에서도 언젠가는 민주화 요구가 분출할 것이다. 이미 공식 집계만으로도 연 7만 건이 넘는 ‘소요 사태’가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만일 1989년 천안문 사태 같은 정치적 혼란이 발생한다면 중국 공산당은 과연 덩샤오핑 시대처럼 대응할 수 있을까. 결국 중국도 정치개혁을 해야 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혹독한 정치·경제·사회적 혼란과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다. 설사 중국 공산당의 일당독재가 지속된다 해도 그처럼 이념·제도·현실 간의 괴리가 엄청난 체제가 바람직할까.

그렇다고 싱가포르 국민행동당의 일당독재를 부러워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닐 것이다. 아무리 질서정연하고 깨끗한 고소득 사회가 좋다 해도 껌도 마음대로 못 씹고, 범법자들에게 전근대적 태형을 가하고, 총리 가문이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사회를 동경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대만이 그나마 우리와 유사하게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룩하면서 민주주의 체제를 다지고 있다지만 야당인 민진당은 야당의 역할을 넘어 ‘중화민국’의 국가적·민족적 정체성 자체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결국 동아시아에서 좌와 우, 보수와 진보가 균형을 이루면서 상호 견제하에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다. 냉전 최대의 피해국이고 북한에서는 공산 세습 독재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한국은 일찍이 수평적 정권교체를 통해 진보좌파 정권을, 그것도 두 번이나 연거푸 선택하면서 건국 이후 우익보수 일변도의 정치를 극복해 왔다. 그 결과 많은 정치적 혼란이 초래되고 사회 갈등이 표출됐지만 한국의 정치는 역동성을 잃지 않았고 민주주의의 체력은 강해지고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제 큰 뿌리를 내렸다. 다만 각자의 이해를 표출하는 방식이 너무 거칠다는 것이 문제다. 그러나 만일 우리 모두, 특히 정치인들이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자긍심을 갖고 그에 걸맞게 행동한다면 2010년은 대한민국이 성숙한 선진 민주국가의 반열에 오르는 원년이 될 것이다.

함재봉 미국 랜드연구소 수석정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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