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이런 휴가, 저런 휴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하느님이 말씀하시기 시작하셨다. "빛이 있게 되라. " 그러자 빛이 있게 되었다. 보시기에 빛이 좋았다.

그렇게 엿새 동안 천지창조를 하시고 만드신 것들을 둘러보니 그것이 보기에 아주 좋았다. 일곱째 날은 만드시던 모든 일로부터 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날을 거룩한 날로 정해 복을 주셨다는 게 '구약성서' 창세기 첫 대목이다.

일요일은 물론 여기서 유래했다. 휴일.휴가라는 것은 아무 일도 안하고 편히 쉬어서 축복받는 시간이다.

일상 하던 일로부터 철저하게 떠나는 것이다. 일상에서 놓여나 멀리서 객관적으로 우리가 한 일을 '보기에 좋다, 나쁘다' 며 둘러볼 수 있는 게 휴가다. 그러나 휴가는 무엇보다 먼저 텅 비움이다.

1936년 유급휴가를 받아낸 프랑스 노동자들이 전세계적으로 퍼뜨린 '바캉스' 란 뜻도 텅 빈 공백이다. 그들은 지금 연 5주 가량의 휴가를 즐기고 있다.

노동자뿐 아니라 고용주도 대통령과 총리 등 직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상하좌우 눈치볼 것없이 일을 텅 비우고 휴가를 떠난다.

"일만 알고 휴식을 모르는 사람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다" 고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말했다.

토니 블레어 영국총리는 아버지 역할을 하기 위해 2주간 휴가에 들어갔었다. 콜 전 독일총리도 재임중엔 독일통일의 산적한 문제를 놔두고 휴가를 떠났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휴가는 어떤가. 박지원(朴智元)문화관광부장관은 지난해 한 일간지에 쓴 글에서 "9년여째 새벽에 집을 나서면 자정께 들어가고 휴일이나 주말, 휴가는 생각지도 않은 지 오래다" 고 밝혔다.

이게 어디 朴장관만의 사정이겠는가. 격무에 쫓기든지, 이 눈치 저 눈치 살피다 보면 자신의 자리는, 일상은 텅 비우지 못하고 우리가 어렵게 제도적으로 따낸 휴가 자체만 비게 만든다.

이번 휴가만큼은 휴가답게 보내겠다며 떠났으나 미처 반도 못채우고 돌아온 김대중(金大中)대통령. 골프나 즐기는 것 같았으나 '밀약설' 등으로 정국을 끓어오르게 하고 일본으로 떠난 김종필(金鍾泌)자민련 명예총재. 극명하게 대비되는 이 두 '사건' 이 아직 우리는 투명한 제도가 아니라 밀약이나 보이지 않는 무슨 무슨 연줄이 여전한 사회에 살고 있으며 때문에 휴가는 신이 내려준 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새삼 깨치게 한다.

이경철 문화부차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