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내 인생 소리에 묻고 (2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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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25. 함께 했던 고수들

다른 명창들도 그렇지만 나는 이정업(1908~74)의 북가락을 최고로 친다. 그 다음이 김동준.한일섭.김득수.김명환 순이다.

악사 집안에서 태어난 이정업은 줄타기의 명인이었다. 61년 원주에서 줄을 타다 줄을 맨 말뚝이 부러지면서 떨어져 부상을 입었다.

그때부터 고수로 나섰다. 전에도 심심풀이로 북을 치긴 했지만 이동백 명창의 추천으로 한성준 문하에 들어간 후에 제대로 배웠다.

나보다 여덟 살 위인 그를 '형님' 이라 부르면서 무척 따랐다. 소리는 한 마디도 못했지만 북장단은 남부럽지 않았다.

화려하지 않지만 정확한 한배(박자)에다 소리를 포근하게 감싸는 가락이 일품이다. 추임새도 독보적이라 장시간 공연으로 지친 소리꾼에게 새 힘을 불어 넣는다.

김연수 명창과 명콤비를 이뤘던 그는 북을 치다가도 슬픈 대목에 다다르면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뚝뚝 흘렸다.

죽기 보름 전에 열린 오정숙 명창의 '수궁가' 공연에서는 처음부터 눈물을 흘려 고수를 바꾸는 사태가 벌어졌다.

북은 객석 정면을 향해 놓아서는 안되며 고수의 발이 객석에서 보여도 볼썽 사납다. 북을 옆으로 놓고 무릎을 받쳐 눌러 고정시키고 허리를 쭉 펴야 한다.

고수의 자세는 김동준(1928~90)이 최고다. 정윤섭과 한성준에게 배워 북채를 왼손에 쥐고 쳤다. 요즘 잘 나가는 고수 김청만(국립국악원 지도위원.54)의 스승이고 조상현 명창과는 처남 매부 지간이다.

전남 화순 태생으로 박동실에게 소리를 배우다가 40세 때 목이 상해 북채를 잡았다.

김득수(1917~89)는 진도 태생으로 이동백 명창을 사사하고 김천과 경주의 권번에서 기생들의 '소리 선생' 을 하다가 나를 만나 50년 넘게 함께 지내온 단짝 친구였다.

태평양 전쟁 당시 탄광과 공장에 위문공연을 함께 다니기도 했다. 그때는 '흥보가' 에 흥보 자식들이 일본에 충성하러 즐겁게 군대에 간다는 내용을 넣어야 했다.

재담 잘하고 잘 웃기는 소리꾼이었으나 심장병을 앓고 난 뒤 45세에 북채를 잡았다. 허나 소리를 좀 했다고 해서 거만한 편이었다. 걸핏하면 목에 힘을 주고 "좋지" "좋다" 하며 대꾸한다. 욕을 퍼부어도 "그렇지!" 하면서 무게를 잡았다.

"야 이놈 고수야. 나는 팔십 평생 소리를 허느라 목구녕에서 피가 넘어오는디, 네놈은 평생 맥없이 북만 두들겨패니 오뉴월 쇠불알 늘어지듯 팔자 한번 늘어졌구나. 워디 네 놈은 북을 패고 나는 춘향가나 한바탕 불러 볼꺼나" 그러면 "아이구, 내가 발뒤꿈치에 감기가 걸려서 북을 칠랑가 모르것네" "오냐, 내 아들놈아" 하고 척척 받아 넘겼다.

소리가 힘들어 고수로 전향한 한일섭(1929~73)은 나와 가장 막역한 사이였다. 68년 '흥보가' 완창무대에서 북을 도맡아 쳤다. 연주 실력도 뛰어나 아쟁의 윤윤석.박종선, 대금의 이생강.원장현 등의 제자를 길러냈다.

그리고 나는 잘 친다고 소문난 김명환(1913~90)을 탐탁치 않게 생각 한다. 이정업처럼 줄타기를 하다 떨어져 다쳤는데 김소희 명창이 북을 배우라고 권했다. 하도 잘 친다 소문이 자자해 얼마나 잘 하나 한번 데리고 왔는데 모르는 장단이 많았다. 맨날 질질 짜는 여자들 소리만 맡아서 북을 쳤으니 말이다.

요즘 소리할 때는 주봉신(66)이 주로 북을 친다. 전주 출신으로 이동백 명창의 제자인 이만암에게 '흥보가' 를 배웠다.

지방 국악원 소리 선생을 하다가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농악단 활동을 하다 76년 나를 만났다. 북을 개 패듯 치는 게 흠이지만 어쨌든 내 소리의 구석구석을 잘 아는 편이다.

박동진 <판소리 명창>

정리=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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