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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간 외출 않고, 팔만대장경 一讀하고 … 쉼 모르는 ‘청소년 교화의 대모’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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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호 31면

교계 원로이신 탄허·석주·고산 대종사께서는 신흥사를 즐겨 찾으셨다. 세 분은 이구동성으로 “성일 스님처럼 신심과 원력이 뛰어난 사람이 각 도(道)에 한 명씩만 있다면 근심이 없겠다”고 말씀했다.

내가 본 성일 스님

40여 년 전 성일 스님의 남다름을 가까이에서 접한 적이었다. 탄허 대종사께서 번역·주해하신 저 유명한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의 출간을 위해 수년간 함께 교열 작업에 참여한 것이다.

석파정과 대원암을 오가며 작업한 탄허 스님의 제자는 각성 스님을 비롯해 무비·통광·일장·연관·성일 스님이었다. 빈도(貧道) 또한 말석으로 참가하는 행운을 얻었다.

일과 시간은 오전 3시부터 오후 9시. 대종사께서는 조금도 지치거나 힘들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우리들은 끙끙대기 일쑤였다. 그러나 성일 스님의 교학 태도는 본보기로 삼기에 충분했다.

수행·교화의 한계 상황을 극복해온 성일 스님에게 따라 붙는 이름은 여러 가지다. 특히 사람들은 스님을 ‘청소년 교화의 대모’라고 부른다. 스님이 주지의 소임을 맡았을 때 신흥사는 금방 쓰러질 듯한 슬레이트 지붕의 요사(寮舍) 한 동이 전부였다.

스님은 절을 중창해 청소년 교화를 펼치겠다고 자신과 석불(石佛)에게 맹세했다. 산문(山門)을 굳게 걸어 잠그고 일주문(一柱門) 밖을 나가지 않았다. 10년 동안 오직 기도·정진에 열중하는 동안 대웅전·수련관 등 2000여 평에 이르는 건물군이 완성됐다.

10년 정진을 마치고는 다시 팔만대장경을 독송하는 정진을 시작했다. 성일 스님에게 휴식이라는 것은 없었다.

한국 불교의 신행 전통에서는 금당(金堂)에서 불보살(佛菩薩)의 명호(名號)를 부르며 정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성일 스님은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고구정녕(苦口丁寧)하게 말씀하신 일대 장경을 일독(一讀)만이라도 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제자와 함께 경전 봉독에 들어갔다.

이와 같이 스님은 불사·수행·교화를 동시에 실천했으니 말법(末法) 시대를 만난 수행자로서 시대를 초월한 사문(沙門)의 표상이라 하겠다. 빈도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스님은 큰 도(道)의 요점을 들을 수 있게 되었고 신흥사를 찾는 신남신녀(信男信女)들은 친히 그 가르침의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신흥사에 광명을 주시어 사람들에게 은덕을 베풀어 복덕을 짓는 일에 모자람이 없게 한 것입니다.”

성일 스님이 말했다. “청소년 수련원에서 하룻날 하룻밤만 수련에 동참했더라도 불법인연이 소중하다.” 청소년 수련원을 거쳐 간 사람들이 1 년이면 수만여 명, 지금까지 수십만을 헤아린다. 신흥사는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학생들을 경기도 교육청으로부터 위탁받아 수련 교육을 실시하기도 한다. 그들은 새로운 삶의 지혜를 깨닫고 학교생활에 복귀한다. 더없이 보람된 일이다.

성일 스님은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부처님 교화공원 불사를 시작한 것이다. 살아 있는 교육환경을 통해 부처님 곁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교육장을 만들고 싶어서다. 스님의 한결같은 불사 수행과 교화는 이순(耳順)을 넘긴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성일 스님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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