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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론은 희망을 잃고, 임금은 이성을 잃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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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호 32면

윤지의 벽서로 시작된 나주벽서사건은 토역경과사건과 맞물리면서 탕평책을 완전히 붕괴시키고 노론 일당 독주 체제를 만들었다. 우승우(한국화가)

절반의 성공 영조⑥ 나주벽서사건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영조는 재위 17년(1741)의 신유대훈(辛酉大訓)으로 자신이 역적의 수괴로 등재된 『임인옥안』을 불태우고 경종 당시 있었던 ‘세제 대리청정’ 주장은 역모가 아니었다고 선포했다. 영조는 이로써 자신의 과거가 깨끗하게 정리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의 과거사는 경종의 편에 섰다가 자신이 즉위하면서 몰락한 소론 강경파(埈少)와 화해를 통해서만 정리될 수 있는 문제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었다.

신유대훈에 동의한 소론은 정권에 참여했던 온건파(緩少)뿐이었다. 게다가 신유대훈 이후 노론이 조정을 장악하면서 탕평책은 명목상의 존재로 격하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 영조 31년(1755) 2월 4일 전라감사 조운규(趙雲逵)의 급보로 시작된 나주벽서사건이었다. 나주 객사(客舍)인 망화루(望華樓) 정문에 ‘간신이 조정에 가득해 백성의 삶이 도탄에 빠졌다’는 내용의 벽서가 걸리면서 시작된 사건이었다. 영조는 좌의정 김상로(金尙魯), 우참찬 홍봉한(洪鳳漢) 등을 불러 전라감사의 장계를 보이면서 “이는 황건적과 같은 종류인데, 틀림없이 무신년(이인좌의 난) 때의 여얼(餘孼)이다. 그러나 무신년에 최규서(崔圭瑞)가 고변하였을 때도 나는 오히려 동요하지 않았다”라고 말하고는 웃었다.

영조처럼 감정 기복이 심한 인물이 자신의 치세를 전면 부정하는 흉서를 내보이며 웃었다는 것은 그만큼 충격이 컸다는 방증이었다. 영조는 좌·우변(左右邊) 포도대장을 입시시켜 기한을 정해 범인을 체포하라고 명했다. 벽서는 필적을 숨기기 위해 똑같은 자획으로 썼지만 범인을 체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주 정도의 작은 고을에서 목숨을 걸고 영조를 비난할 사대부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연 며칠 지나지 않아서 범인 윤지(尹志: 1688~1755)가 체포되었다. 영조 즉위년에 김일경 일파로 몰려 사형당한 소론 강경파 윤취상의 아들이었다. 부친이 사형당한 후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만 18년 만인 영조 19년(1743) 나주로 이배(移配)된 인물이었다. 지난 30년 세월이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영조와 노론이 지배하는 한 미래가 없었던 인물이었다. 영조 즉위와 동시에 그의 자리에서 영조는 선왕을 독살한 역적일 뿐이었다.

사건 연루자인 임천대(林天大)는 윤지가 나주에서 30여 명을 모아 계를 만들었는데 먼저 벽서를 걸어 인심을 소란시킨 후 거사하자고 말했다고 자백했다. 계원인 임국훈(林國薰)은 윤지가 맡긴 각종 책자와 편지를 압수당했는데 그중에는 목호룡의 고변서도 있었다. 윤지와 가장 많은 편지를 나눈 전 나주목사 이하징(李夏徵)은 국문에서 “김일경의 상소가 있은 뒤에야 비로소 신하로서의 절개가 있다고 여겼다”면서 “꿈에 윤취상을 배알했다”고까지 말해 영조를 충격에 빠트렸다. 영조는 윤지 부자를 사형시킨 후 그의 집을 저택(<7026>宅: 연못으로 만듦)하고 이하징·박찬신(朴纘新)·조동정(趙東鼎)·조동하(趙東夏)·김윤(金潤) 등 연루자를 처형했다. 또한 이미 사망한 조태구·유봉휘 등에게 역률을 추가했다.

영조는 같은 해 4월 태묘(太廟: 종묘)에 나가 역적들을 모두 토벌했다고 고하고 5월 2일에는 이를 축하하는 토역(討逆) 경과(慶科)를 베풀었다. 나라에 기쁜 일이 있을 때 행하는 특별 과거였다. 그런데 파리 머리만 한 작은 글씨로 영조의 치세를 비난하는 시권(試券: 과거 답안지)이 제출되어 영조를 경악케 했다. 이인좌의 봉기 때 사형당한 심성연(沈成衍)의 동생 심정연(沈鼎衍)이 제출한 시권이었다. 또 답안 대신 ‘상변서(上變書)’도 제출되었는데, 『영조실록』은 “임금이 다 보지 못하고 상을 치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내용이었다. 심정연은 친국하는 영조에게 “이는 일생 동안 나의 마음으로서 과장(科場)에 들어오기 전에 미리 써 두었던 것”이라고 답했다.

심정연은 윤지의 숙부이자 윤취상의 아우인 윤혜(尹惠)와 모의했다고 자백했다. 윤혜에게서 압수한 문서에는 선왕들의 휘(諱: 이름)가 쓰여 있었다. 영조가 그 이유를 묻자 “내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상고하느라 썼다”고 답했다. 영조가 주장(朱杖: 붉은 곤장)으로 마구 치게 했으나 윤혜는 혀를 깨물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이미 군신 사이가 아니었다. 영조는 보여(步輿)를 타고 종묘에 가서 엎드려, “나의 부덕으로 욕이 종묘까지 미쳤으니 내가 어떻게 살겠는가?”라고 울었다. 그러나 영조는 경종의 충신으로 자처하는 소론 강경파의 처지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생각은 없었다. 영조는 군사를 일으킨다는 뜻에서 갑주(甲<5191>)를 입고 친국에 임했는데, 『영조실록』은 이때 영조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전하고 있다.

“이때 임금이 크게 노하고 또 매우 취해서 윤혜의 수급(首級: 머리)을 깃대 끝에다 매달고 백관에게 돌아가며 조리돌리도록 명하면서, ‘김일경과 목호룡의 마음을 품은 자는 나와서 엎드려라’라고 말했다.…임금이 일어나 소차(小次)로 들어가 취해 드러누웠다.(『영조실록』 31년 5월 6일)”

분노 속에 술을 마셔 이성을 상실한 영조는 사형을 남발했다. 소론 강경파도 이판사판이어서 심정연과 친했던 강몽협 등은 60여 명으로 춘천부(春川府)를 공격하려 했다는 혐의로 사형당했다. 각 도에서 연루자가 연일 체포되었는데 영조는 그해 5월 12일 강원·전라·경상·함경·경기 다섯 도의 감사에게 사민(士民)을 안정시키라는 명을 내려야 했다. 영조는 그해 5월 16일 좌의정 김상로(金尙魯)에게 “연달아 없애 다스려도 조금도 징계되어 그치지 않으니 장차 어찌해야 하겠는가”라고 물었다. 노론 영수 김상로에게 적당(敵黨)의 처리 문제를 물은 것이니 답은 뻔했다. 김상로는 “이는 반드시 큰 소굴이 있어서 적(賊)들이 이를 믿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했고, 영조는 “내가 반드시 그 소굴을 찾아낸 후에야 편하게 잠을 잘 수 있겠다”라고 다짐했다.

현실에 대한 불만이 경종에 대한 충심으로 연결되어 목숨 걸고 저항하는 것이란 생각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영조와 노론 정권은 연루자를 모두 죽이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죄인 김요덕이 물고되었는데 김일경의 종손이다. 김일경의 종자(從子) 김유제·김인제·김덕제·김홍제·김대재·김우해와 종손 김천주·김요백·김요채·김요옥·김요덕 등은 심정연의 초사 때문에 모두 국문을 받았는데, 김인제는 승관(承款)하여 정형(正刑: 사형)되었고, 김요백·김요채는 역적 윤혜와 함께 효시되었으며, 그 나머지는 모두 장(杖)을 맞다 죽었다.(『영조실록』 31년 5월 18일)”

김일경의 후손 중에 중으로 변장한 인물이 있다는 정보가 있자 각 사찰을 대대적으로 색출해 김일경의 종자(從子) 김창규(金暢奎)를 끌고 왔다. 김창규는 “먹고살 길이 없어 걸식했을 뿐”이라고 답하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자 갑자기 “어서 빨리 나를 죽여라(只當速殺我: 5월 20일)”라고 소리쳤다. 김일경이 영조에게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고 대든 것과 같은 말이었다. 드디어 전 승지 신치운(申致雲)은 영조에게 “신은 갑진년(1724: 경종 4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소”라고 대들었다. 이 말에 영조는 분통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경종이 와병 중일 때 대비 인원왕후가 게장을 올리고 왕세제(영조)가 상극인 생감을 올려서 독살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었다.

나주벽서사건과 토역경과사건으로 처형당한 소론 강경파는 500여 명에 달할 정도였고, 이후 영조는 형식적 탕평책마저 완전히 붕괴시켰다. 영조는 이종성(李宗城)·박문수(朴文秀) 등 극소의 인물을 제외하고는 소론 온건파도 모두 조정에서 쫓아냈다. 그해 11월 영조는 『천의소감(闡義昭鑑)』을 발간했는데, 노론 4대신은 물론 목호룡의 고변으로 사형당한 김용택 등도 모두 충신이라는 내용이었다. 또한 게장은 자신이 보낸 것이 아니라 어주(御廚: 대궐 수라간)에서 올린 것이라는 대비 인원왕후의 변명도 실었다. 영조와 노론, 그리고 인원왕후의 ‘과거사 다시 쓰기’였다.

그러나 경종 시절 영조와 노론의 행위는 경종의 자리는 물론 어느 국왕의 자리에서 볼 때도 반역행위가 분명하다는 점에서 영조와 노론의 과거사 지우기는 무리일 수밖에 없었다. 다음 해인 재위 32년(1756)에는 노론에서 정신적 지주로 삼는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했다. 드디어 노론이 한 당파의 이념을 넘어 국가의 이념임을 선포한 셈이었다. 소론과 남인은 명맥만 겨우 유지하는 정도로 전락하고 노론 일당 독주가 강화되었다. 대리청정하던 사도세자가 이런 정국에 불만을 품으면서 소론 강경파에게 향했던 영조와 노론의 칼끝은 사도세자를 겨냥하게 됐다. 반대파를 모두 제거하고 탕평책을 붕괴시킨 노론 일당의 권력이 국왕의 후계자를 겨냥할 정도로 막강해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