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칼럼] 숭례와 창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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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한국에 오기 전 친구들이 말했다. 동양의 전통문화를 보려면 한국에 가보라고. 한국에 온 지 6개월이 지났다.

아닌 게 아니라 친구들 말대로였다. 한국은 정말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자 동양의 전통미덕을 아직도 많이 보존하고 있는 현대적 국가다.

서울의 지도만 봐도 전통문화 냄새가 물씬 풍긴다. 충신동.인의동.효제동.장충동.충정로.묵정동.퇴계로.사직동…. 거리로 나서면 이런 분위기를 더욱 실감할 수 있다.

국보 1호라는 남대문. 날아갈 듯한 처마에 웅장한 성문은 서울의 상징으로 손색이 없다. 남대문의 정식 명칭은 숭례문(崇禮門). 숭례란 예의를 숭상한다는 뜻 아닌가.

공자는 예(禮)를 가장 중시해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고 예의를 지키는 것이 인(仁)" 이라 했다. 또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말라" 고 했다.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예의 바르고 온화하고 겸손했다. 한국어에서 겸어와 경어가 특히 발달한 점이 인상깊었는데 역시 예의를 소중히 여기는 습속이 반영된 탓이리라. 수시로 개최되는 각종 문화제와 민속제에서 전통을 보존하려는 한국인의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유가사상의 본고장인 중국보다 되레 한국이 동양의 전통과 문화를 더욱 잘 보존하고 있는 것 같다. 중국은 19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 문화대혁명을 겪으면서 전통문화를 봉건악습으로 규정해 철저히 파괴했다.

각종 문화유산과 고적들도 훼손됐다. 70년대 말에서야 비로소 잘못을 깨닫고 복구에 나섰지만 손실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공자는 말했다. "예의, 예의 하는데 옥기(玉器)나 비단을 말하는 것인가? 종(鐘)이나 북을 말하는 것인가?" 예의에서 중요한 것은 의식을 진행하는 데 필요한 외형적 설비가 아니라 진실한 마음과 성의라는 뜻이다.

동양문화의 핵심은 예의를 통해 인간 상호간의 진실한 교류를 이룩하고 그 과정에서 형성된 이해와 관용을 확대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남대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창덕궁이 있다. 창덕(昌德)은 무슨 뜻인가. 도덕적인 정신을 배양해 도덕적인 정치를 하겠다는 뜻이다.

예의를 기본 출발점으로 해서 고매한 도덕적 인격을 완성한 임금이 덕정(德政)을 베풀어 태평성대를 이룩하겠다는 포부가 담겨 있다. 예와 덕은 일체양면으로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맹자가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외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있다" 고 주장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21세기로 접어든 지금 대다수 인류는 물질적 풍요 속에서 점차 물질의 노예로 전락하고 있다. 자원은 유한한데 인간의 욕망은 무한해서 경쟁이 심화하고 이에 편승해 서양의 가치관이 보편적 가치기준이 되고 있다.

인간관계는 점차 소원해져 부모와 자식, 친구 사이에도 응당 있어야 할 미덕이 실종되고 있다. 이런 터에 한국인들이 유가도덕의 숭고한 미덕들을 여전히 존중하고 이를 실천하려 한다는 점은 매우 고무적이다.

동양의 전통문화는 기본적으로 윤리와 도덕에 최고가치를 두었다. 최근 저명한 아시아권 학자들이 동양의 전통문화나 유가문화 혹은 아시아적 가치를 부쩍 강조하고 있다.

일본학자 미조구치 유조(溝口雄三)는 "21세기에 중국학이 담당해야 할 과제는 세계적으로 만연된 경제지상주의를 발전적 각도에서 비판하면서 중국의 유가전통에 근거한 인애(仁愛)와 조화의 세계관을 인류 공동의 문화로 제시하는 데 있다" 고 주장한다.

서양인들이 신유가(新儒家)의 대부로 지목하고 있는 싱가포르의 리콴유(李光耀)전 총리는 "문화란 뿌리깊은 것으로 매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면서 서양의 도덕적 타락을 비판하고 아시아적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

그 요체는 유가사상에서 늘 이야기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다. 먼저 개인의 인격수양에서 시작해 이를 바탕으로 가정과 나라를 잘 다스리고 세계평화를 이룩한다는 개념이다.

숭례와 창덕. 이 두 개의 명사에는 유가사상의 핵심이 담겨 있다. 숭례문과 창덕궁은 바로 유가사상의 진수를 담은 명칭이다.

한국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이 숭례문과 창덕궁에서 출발하는 것은 그래서 하등 이상할 게 없다.

진위안푸(金元浦) <중국인민대학 교수.한양대 교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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