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파이 나누기' 갈등의 해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한 아이가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왜 우리는 없는 것이 많아요? 자가용도 없고, 에어컨도 없고, 그 흔한 컴퓨터도 없어요?"

"아니란다. 없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란다. "

의아해 하는 아이의 눈을 피한 채 한숨처럼 내뱉는 말 - . "돈이 없단다. "

시중의 우스개이지만 그냥 웃어넘기기엔 좀 아프다.

이 이야기를 각색해보자.한 학생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세상이 왜 이렇게 어지러워요? 의사들이 폐업하고, 은행원들도 파업하고, 호텔 종업원들은 복날 개처럼 얻어맞나요?"

"이유는 하나뿐이란다. "

어리둥절해 하는 학생을 외면하며 내뱉는 말 - . "돈 때문이란다. "

원인을 알았다면 처방도 쉽겠다. 돈만 있으면, 돈만 벌 수 있으면 된다. 과연 그럴까. 첫째의 해결책은 열심히 돈을 모으는 것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사고 한번 안당하고, 사기도 안당하고 돈을 모으기란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한푼 두푼 저축하다보면 중고차 한 대쯤은 마련할 수 있다.

컴퓨터는 사는 순간 고물이 되니까 아예 재작년에 산 셈치고 486급을 마련하면 된다. 워드프로세서로는 오히려 적당하다. 말만 잘 하면 거저 얻을 수도 있다.

둘째 해결책도 돈 문제 같은데 좀 어렵다.

의사들은 "국민 건강을 위해서" 란다. 한편으론 "최고 지성인인데 일개 공무원이나 약사에 휘둘리는 것은 체면이 말이 아니다" 고 한다.

그래서 장관이 아니라 대통령과 상대하자고 한다. 약사들은 "국민의 편의와 비용 부담 때문" 이란다. 정작 국민은 아무 말도 못하고 병원과 약국을 헤매는데 말이다.

은행원은 "노동권 확보 차원" 이라고 하고 호텔 종업원은 "자존심 때문" 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들 명분의 껍질을 벗겨보면 바로 돈 문제고, 파이 나누기 문제다.

파이를 적정하게 배분하기 위해서는 천칭(天秤)이 필요하다. 이 천칭이 평형을 찾기까지는 양쪽을 더하고 덜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시장원리란 바로 이를 통한 접점 찾기다.

여기서 전제조건이 신뢰다.

그런데 의사들은 정부와 약사를 믿지 못한다. "정부는 약사 편(과거 복지부에는 약사 출신이 많았다)" 이라고 주장한다. 임의조제도 "약사들이 법을 어기며 의사의 몫을 빼앗을 것" 이란다.

약사도 의사를 못믿는다. "약을 처방하기보다 주사를 놓을 것" 이란다. "구하기 힘든 약을 처방하거나 '대체조제 금지' 를 남발할 것" 이란다.

은행원들은 자신들을 따돌리고 구조조정을 밀어붙이는 정부를 믿을 수 없고, 호텔 종업원들은 자신들이 보잘 것 없는 약자여서 당한다고 믿는다.

불신의 결과는 폐업과 파업, 재파업이다.

이는 천칭이 평형을 이루는 데 불가피한 절차가 아니다. 불신이란 바이러스에 감염돼 발병한 '집단적 자해(自害)증후군' 이다.

의사들이 청진기와 메스를 놓고, 노동계가 제2의 환란도 감수하는 것은 기둥에 자신의 머리를 쾅쾅 찧으면서 호소하는 차마 눈 뜨고 못 볼 자해성 시위다.

차라리 마릿수가 늘어나 먹이가 줄면 집단으로 바다에 뛰어든다는 노르웨이 레밍이 훨씬 순진하다고나 할까.

모두를 만족시킬 만병통치 처방은 없다. 더딘 것 같지만, 상호 신뢰를 회복해 합의를 도출할 때까지 참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노동계는 전번 파업 때 민영화를 추진 중인 한국전력노조와 철도노조를 끌어들이려 했다. 이들이 참여하면 폭발력은 엄청나다.

그런데 이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노사가 성실하게 협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성실한 자세는 불신이란 바이러스를 창궐케 해 자해증후군을 야기한다. 이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백신은 '성실' 뿐이다.

박종권 <사회부 차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