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신용경색의 본질과 처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금융장이 얼어붙었다. 일부 재벌 계열사를 제외한 크고 작은 많은 기업들이 회사채나 CP 신규 발행을 통한 자금조달은 물론이려니와 이미 꾸어 쓴 돈을 갚기 위한 차환발행도 어렵다.

올 하반기에 상환할 회사채와 CP가 수십조원에 달하니 기업 자금담당자들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하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이후 돈은 총통화(M2)기준으로 2백조원에서 3백50조원 이상으로 연평균 30% 가까이 늘었음에도 자금경색이라니 풍요 속의 빈곤이 이만저만 아니다.

***투신 부실이 문제 발단

발빠른 분석가들은 이번 신용경색을 보고 10월 말 위기설.제2의 경제위기설까지 제기했다. IMF 졸업 선언이 엊그제 아니었던가. 시정(市井)사람들은 어리둥절해 하고 있다. 정부는 회사채와 CP의 수요기반 확충을 목적으로 10조원 규모의 채권형 펀드를 조성했다. 말로는 금융기관들의 자발적 참여라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정부의 강권에 따른 것이다.

이것은 지난해 여름 대우사태 때 정부가 주도한 30조원 규모의 채권안정기금 조성과 별로 다르지않다. 성공하기도 어렵지만 효과가 있더라도 일시적일 뿐이다. 눈앞에 닥친 위기관리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인 치유책을 외면하면 더 큰 위기를 불러올 텐데 안타깝기 짝이 없다.

신용경색은 어디에서 시작됐는가? IMF 구제금융 이후 5개 은행 퇴출을 포함, 은행구조조정이 진행되자 시중자금이 투신으로 대거 이동했다.

그러나 투신은 최근 현대투신의 유동성 위기와 한투.대투 부실에서 드러나듯 오래 전부터 은행 이상으로 부실한 상태였다.

지난해 7월 대우사태로 투신 부실이 표면화하자 시중자금이 이번에는 투신을 이탈해 은행으로 몰려갔다.

그 결과 투신의 구매력에 의존하던 회사채시장의 기능이 거의 마비됐다. 종금사도 최근 인가취소(나라).영업정지(영남).자금악화(한국).예금지급 중단(중앙) 등으로 놀라 돌아서는 고객을 붙잡기에 역부족이어서 CP 시장을 지탱할 구매력이 없었다.

반면 자금이 풍부해진 은행은 2차 구조조정을 앞두고 국제결제은행(BIS)비율을 맞춰야 하니 섣불리 자금을 풀수 없다.

부실대출에 대해서는 법적 책임까지 묻겠다니 필요 이상으로 움츠러들었고, 법정관리나 워크아웃에 들어간 기업에 우선 대출을 해주자니 건전한 기업에 신경 쓸 겨를도 없다.

게다가 정부가 은행간 짝짓기를 강권하는 분위기 속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려면 여신을 자제해 건전도를 높여야 한다.

결국 은행은 대출이나 회사채.CP 구매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신용경색 문제 해결의 단기적 처방은 은행이 BIS비율은 준수토록 하되 나머지 불필요한 속박으로부터 해방돼 자금운용에 유연성을 갖게 하는 것이다.

중장기적으로는 금융기관이 시장으로부터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투신.종금.은행 등 모든 금융기관의 부실을 투명하고 정직하게 밝혀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일정한 기준에 미달하는 금융기관은 투신이든, 종금이든, 은행이든 과감히 퇴출돼야 한다.

실업을 포함해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작용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두려워만 하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일시적 땜질로 하루하루 연명하기보다는 단기적 고통을 참고 장기적으로 건실한 경제토대를 마련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만 구조조정의 부작용 최소화에 필요한 공적자금은 국민의 이해를 구하고 투명하게 조성해 적기에 충분히 투입해야 한다. 늘어나는 실업자의 최소생활 보장과 재취업을 위한 제반여건 마련도 중요하다.

***부실기업 과감히 퇴출을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실물부문의 부실기업 퇴출 없이는 백약이 무효다. 채권형 펀드 조성이나 주거래 은행은 물론 산업은행까지 동원해 부실기업에 자금을 지원하는 두루뭉실한 모든 기업 살리기 정책으로는 문제해결이 요원하다.

한정된 자금을 부실기업에까지 넣다가는 건전기업까지 망하지 않겠는가. 부실기업, 한 예를 들면 몇년째 영업이익으로 이자비용도 치르지 못하는 수많은 부실기업들은 과감히 퇴출시켜야 한다. 이것은 한국 경제가 살 수 있는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다.

정운찬 서울대 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