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티즌 선정 ‘키워드로 본 2009년 10대 사건’… 조두순 사건 그 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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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이가 지난 16일 주치의 신의진 교수에게 보낸 성탄절 카드. 두려움은 사라지고 또박또박한 글씨로 “감사하다”는 긍정의 메시지를 담았다.

아이의 쌍꺼풀 없는 두 눈이 장난기로 반짝였다. 아이를 만나러 간 16일, 기둥 뒤에 숨은 아이가 고개를 내밀더니 까르르 웃었다. 인사를 했더니 얼굴이 빨개졌다. 아이는 펜과 종이를 달라고 하더니 그림을 여러 장 그려 보였다. 아기 새가 엄마 새에게 선물을 주는 그림, 자신처럼 빨간 옷을 입은 꼬마가 활짝 웃는 그림이었다. 얼굴을 보여줄 수 없었던 아이는 그동안 그림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드러냈었다. ‘나영이’라는 가명으로 알려진 아홉 살 여자아이다.

세상에 알려진 나영이의 첫 그림은 밝지 않았다. “범인이 벌을 받았으면 좋겠다”며 자신을 성폭행한 조두순(57)이 벌레가 있는 감옥에 갇혀 망치로 머리를 맞고 눈물을 흘리는 그림을 그렸다. 모든 언론이 이 그림을 나영이 대신 내보냈다. 사건 후 아이는 우울증과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렸다. 고통이 그림에 투영돼 있었다. 나영이는 한동안 말과 웃음을 잃었다. 별것 아닌 일로 주변 사람들에게 짜증을 냈다. 작은 소리에도 깜짝 놀랐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이는 사건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숨으려 했다. 사건이 일어난 지 두 달 지나서야 나영이는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주치의였던 신의진 연세대 교수는 그 오해를 풀어주는 게 치료의 첫 목적이었다고 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아저씨가 나쁜 거야.”

본지 보도(10월 31일자 1면)로 나영이의 처지가 알려진 뒤, 사회의 따뜻한 손길이 이어졌다. 한 의료업체는 나영이의 성인용 대변 백을 아동용으로 바꿀 수 있도록 도왔다. 세브란스 어린이병원 한석주 교수는 항문 복원 수술을 해주기로 했다. 결과가 좋으면 대변 백을 떼어낼 수도 있다. 나영이 아버지는 “주변의 관심과 도움이 아이를 살렸다”고 했다.

나영이는 변해갔다. 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다. 부모는 전학을 시키려 했지만 아이는 괜찮다고 했다. 다시 집으로 친구들을 데려오기 시작했다. 9월부터는 속셈학원도 다닌다. 그런데 학원이 범행 현장 바로 옆 건물이었다. 아버지는 망설였다. 그러나 나영이는 상관없다고 했다. 수학공부를 더 하고 싶다며 졸랐다. 나영이의 성적은 사건 전으로 거의 회복됐다. 이번 시험도 평균 90점을 넘었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아이는 웃음을 되찾았고, 사람의 손을 잡아끌기 시작했다. 나영이가 기자에게 보여준 그림은 ‘변화’를 담고 있었다.

요리사가 되고 싶다던 아이는 이제 의사를 꿈꾸고 있다. 이유를 물었다. “내가 아팠는데 선생님이 도와줬잖아요.” 신 교수는 “나영이는 이제 70% 정도 회복됐다. 사춘기를 잘 넘기는 일만 남았다”고 말했다.

나영이는 이날 신 교수와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이사 이명숙 변호사에게 그림과 카드를 보냈다. 또박또박한 글씨로 “선생님! 저를 잘 되게 해 주셔서 감사해요”라고 썼다. 옆에서 아버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마도 이건 나영이가 자기를 도와주고 응원해준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는 인사일 겁니다.” 

김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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