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자주적 해결'과 대미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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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금까지는 내가 대미외교 담당관인지, 대북외교 담당관인지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대미외교관으로서의 제 역할을 회복할 수 있게 될 것 같습니다."

6.15 남북 공동선언 직후 대미외교의 원상회복을 희망하는 외교통상부 대미담당 외교관의 말이다. 그의 희망대로 6.15 선언의 '자주적 해결' 원칙은 핵 의혹과 미사일 문제로 대북외교에 종속돼 버렸던 대미외교를 해방시켜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통일의 자주적 해결을 모색하겠다는 6.15 선언으로 우리의 대미외교는 더욱 대북외교에 얽매이게 될 것 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대미외교가 대북 견제를 위한 한.미공조의 단순 방정식 게임이었다면 앞으로의 대미외교는 대북 견제와 공존을 동시에 추구해야 하는 '1+2' 의 복합 방정식 게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동안 '북한문제' 덕분(?)에 별다른 노력없이도 미국의 지속적인 대한(對韓) 방위공약을 얻어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 안보적 차원에서 국제통화기금(IMF) 위기극복을 위한 지원도 얻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6.15 선언으로 우리는 이제 '북한문제〓미국의 대한 지원' 이라는 지금까지의 관계에 안주할 수 없게 됐다.

여기서 우리의 대미외교가 직면한 가장 우선적 과제는 전략적 경쟁상대에서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이행하는 남북관계와 앞으로의 한.미관계를 어떠한 외교 안보적 개념의 틀 속에서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남북관계가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이행하게 되면 지금까지 주한미군의 대북 억지력을 근간으로 한 기존의 외교 안보 틀은 어떠한 형태로든 변화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 말하면 한.미.일 동맹관계를 축으로 한 집단안보적 성격의 외교.안보 틀이 이제 4강의 유동적인 전략게임에 바탕을 둔 세력균형의 외교.안보 틀로 바뀌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선 두가지 문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 첫째는 주한미군의 주둔을 어떻게 정당화할 것이냐 하는 문제일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한반도가 통일된 후에도 주한미군은 계속 주둔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문제는 통일의 자주적 해결에 대한 남북한의 상반된 견해가 완전히 해소되고 있지 않은 듯한 상황하에서 북한이 계속 외세의 배격을 자주적 통일의 원칙으로 강조할 경우 주한미군의 주둔을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정당화하기가 매우 힘들다는데 있다.

이미 일본의 제1야당인 민주당은 미군주둔 없는 미.일 동맹체제의 외교.안보틀을 공론화하고 있는 실정이다. 결코 남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주한미군 문제에 해결책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대북 억지력으로서의 주한미군이 평화유지력으로서의 주한미군으로 그 성격을 탈바꿈하면 되기 때문이다.

북한도 평화유지군으로서의 주한미군에 대한 거부감은 비교적 적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동북아 안보환경의 급격한 변화를 바라지 않는 주변국들의 이해에도 맞아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미국의 신고립주의적 정치조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연간 3백50억달러나 들어가는 주일.주한미군의 주둔문제는 미국에서 이미 중요한 정치적 이슈가 되어온지 오래다.

2015년까지 주한미군을 주둔시키려는 클린턴 행정부의 동아시아 전략은 6.15 선언과 맞물려 어떤 형태로든 미국 대선과정에서 도전에 직면할 것으로 보인다.

냉전기간 동안 13조달러의 경비와 11만3천명의 미국 인명을 희생시킨 대아시아 개입정책에 반기를 들고 있는 공화당 싱크탱크의 주장이 공론화하는 것은 시간문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자주적 해결원칙에 한.미동맹 관계를 조화시키는 일이야 말로 선(禪)문답에서 한 손으로 손뼉치는 수수께끼를 푸는 작업과 같아질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남과 북의 두 손뼉으로 이 수수께끼가 쉽게 풀릴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대미담당관의 창의력 있는 본격적인 대미외교를 기대해 본다.

장달중<서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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