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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보다 더 불안한 북한의 화폐개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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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주체사상을 빗대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다”는 말이 돌았다. 정말 믿을 것이라곤 자신밖에 없었다. 국영상점은 텅텅 비었으므로 절로 시장이 생겨났다. 물가는 하염없이 올랐고, 장사를 해야 겨우 먹고살 수 있었다. 계획경제가 송두리째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제를 살리자고 개방·개혁으로 갈 순 없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체제유지의 기반이자 김정일 자신의 권력 토대였으므로. 그래서 계획경제의 정상화로 정책방향이 결정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였다. 어떻게 해야 계획 부문의 생산이 제대로 돌아가고 배급을 꼬박꼬박 줘서 주민들을 다시 공장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는가가 핵심이었다. 90년대 말, 그 구체적 방안을 놓고 평양에선 두 파가 격론을 벌였을 것이다. ‘화폐개혁파’는 이미 그때 화폐개혁을 거론했을 것이다. 화폐개혁을 통해 인위적으로 물가를 내리고 시장을 없애자는 논리였다. 그러면 주민들이 계획 부문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개선조치파’는 오른 물가를 현실로 인정하자며 ‘화폐개혁파’의 주장을 반박했을 것이다. 대신 임금을 올려주면 물가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여기에 더해서 공장에 자율권을 주고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해 생산을 독려하면 계획 부문이 순조롭게 정상화될 수 있다고 김정일을 설득했다. 새롭고 과감한 논리였다.

김정일은 ‘개선조치파’의 손을 들어주었다. 2000년쯤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 스스로도 변화의 필요성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사고를 해야 한다고 한 것도 그 즈음의 일이다. “새로운 세기에 들어섰으니 모든 문제를 새로운 관점에서 풀어나가야 한다”고도 했다. 그래서 2002년 7월 1일 경제관리개선조치는 시작되었다. 물가가 안정되면 작은 단위 화폐가 필요할 것이므로 동전도 준비했다. 이번 화폐개혁에 나온 저액권의 발행시점이 2002년인 탓은 그래서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 경제는 기대와는 반대로 돌아갔다. 오히려 시장은 날로 번창했고 공장들조차 국가계획보다는 시장 판매에 더 관심을 가졌다. 100달러 지폐는 주민들에게 ‘딸라 아바이’로 칭송되었고, 장사를 통해 부를 축적한 중산층도 생겨났다.

그렇게 우려하던 자본주의의 싹이 움트기 시작한 것이었고, 북한 사회주의 역사상 최대의 위기가 온 것이었다. 주저할 수 없었다. 정치적으로도 온전한 사회주의를 물려주어야 세습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정일은 다시 ‘화폐개혁파’를 불러 모았다. 아마 3~4년 전의 일일 것이다. 한국은행이 5만원권 발행에 2년여가 걸렸으므로 종이나 잉크·전기가 부족한 북한은 그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화폐개혁은 그 자체만으로는 계획경제를 보장하지 않는다. 계획 부문의 공급이 정상적으로 작동되어야만 시장으로 떠난 주민과 자본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결국 계획 부문 정상화에 필요한 원자재의 확보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래서 김정일은 2008년 이미 화폐개혁 준비를 완료해 놓고도 시기를 저울질했을 것이다. 대내적으로는 스스로의 경제능력이 어느 정도 마련되는 시점, 대외적으로는 지원의 토대가 구축되는 시점을 기다렸을 것이다. 올해 북한의 150일 및 100일 전투는 그러한 대내적 노력의 일환이며, 중국 고위층의 방북 초청과 남북, 북·미 관계에서의 유화적 제스처는 대외적 노력의 표현일 것이다.

물론 이번 화폐개혁이 성과를 거둘 수도 있다. 그러나 계획 부문의 공급이 충분하지 않으면 시장의 복원 움직임은 다시 일어날 것이다. 먹고사는 문제인 데다가 이미 시장을 경험했으므로 시장을 향한 원심력은 더욱 강해지고 화폐개혁까지 실시한 김정일이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조치는 물리력의 동원일 수밖에 없다. 군대를 앞세운 당국과 주민의 전면 충돌. 경우에 따라선 폭력적 유혈사태라는 비극적 파국상황까지 벌어질 수 있다. 그것이 핵보다 화폐개혁을 더 불안하게 바라보는 이유다.

조동호 이화여대 교수·북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