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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남북관계, 현실과 법의 이중성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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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

영토조항이라 불리는 이 헌법규정은 제헌이래 지금껏 존속되고 있다.

건국헌법의 기초자 유진오(兪鎭午)박사는 당시의 헌법해설서 '헌법해의(憲法解義)' 에서 이 조항의 취지를 이렇게 풀이한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결코 남한에만 시행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나라의 고유의 영토 전체에 시행되는 것이라는 것을 명시하기 위해 특히 본 조항을 설치한 것이다."

영토조항은 사실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규범적 주장을 담고 있다.

兪박사는 한국헌법이 북한지역에도 "시행되는 것" 이라 표현했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시행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 뿐이다.

이 규범적 요구는 더 나아가 이런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대한민국 정부만이 유일한 합법정부며 북한지역에 존재하는 정권은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보는 한 불법단체라는 것이다.

분단현실에 대한 이같은 법적 대응은 독일통일 이전 서독이 취했던 태도와 대비된다.

서독은 그들 헌법에 헌법이라는 공식명칭을 피하고 '기본법' 이라는 다른 용어를 사용했을 뿐 아니라 기본법의 효력이 서독지역 내에만 미친다는 것을 스스로 명시했다.

명분론에 따라 '완전헌법' 의 형식을 취한 한국 헌법과 달리 서독 기본법은 분단현실을 그대로 수용해 '잠정헌법' 임을 밝힌 것이다.

어떻든 한국헌법의 영토조항은 적어도 1972년의 7.4 남북공동성명 이전까지는 한국정부의 대북 정책의 실제와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7.4 공동성명 이후 영토조항의 규범적 의미는 서서히 퇴색과정을 거쳐왔다.

이 과정은 1991년의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및 92년의 남북기본합의서 발효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특히 남북기본합의서 제1조는 "남과 북은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 고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에 비춰보는 한 남북한이 각기 상대방을 법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

합의서 전문에서 "쌍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 라고 규정했으므로 남북이 상호간의 관계에서 상대방을 국가로 승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상대방을 불법집단으로 보지는 않는다는 뜻이 이 규정에 함축돼 있다.

이렇게 보면 북한을 불법단체로 본다는 영토조항 본래의 규범적 의미는 크게 손상됐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영토조항이 사실상 사문화됐다고 말하기 힘든 까닭이 있다.

그것은 국가보안법의 규정 및 그 해석.적용에 의해 북한이 여전히 '국가단체'로 취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보안법에 따르면 "정부를 참칭" 하는 단체는 반국가단체에 해당되는데, 북한이 정부를 참칭하는 반국가단체라는 해석은 영토조항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영토조항에 따르는 한 북한은 이미 그 존재 자체만으로 반국가단체임을 피할 수 없게 돼있는 것이다.

이 같은 견해는 영토조항 폐지론이나 국가보안법 폐지론과 곧 연결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남북한 관계에 관한 우리 법제가 상충하는 요소들을 안고 있음을 지적할 뿐이다.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해 남북한 관계 법령들을 개폐.정비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개폐가 필요한 부분이 있음이 사실이다. 다만 유의할 점이 있다. 남북한 관계의 실제는 여전히 이중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한편에서 화해.협력을 추구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대결 또는 적대적 관계를 부인할 수 없다.

남북한관련 법제상의 이중성은 이같은 현실의 이중성을 반영한 것으로 봐야 한다.

문제는 법의 이중성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합법인 동시에 불법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의 이중성을 도외시한 성급한 법개정은 불안스러워 보인다. 이 딜레마는 탄력적인 법해석과 적용의 묘(妙)를 통해 극복해야 할 것이다.

양건<한양대 법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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