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노동시간 단축 단계적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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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법정 근로시간 단축 논의가 본격화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주(週)44시간인 법정 근로시간을 40시간(주5일 근무)으로 줄이자는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31일부터 총파업에 돌입키로 하는 등 정부를 바짝 압박하고 있고, 관망하던 정부도 원칙 수용 의사를 밝혔다.

재계가 강력 반발하고 있지만 정부가 '연내 법 개정안 제출 계획' 을 밝힌 만큼 앞으로 이 논의가 더욱 활기를 띨 것으로 보인다.

우리도 충분한 휴식과 자기 계발을 통해 삶의 질(質)과 노동 생산성을 높일 수 있도록 근로시간을 줄이자는 주장에 원칙적으로는 공감한다.

우리나라의 실제 근로시간은 주 47.9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회원국 중 최고, 세계적으로는 일곱째로 길다. 대부분의 선진국은 이미 주 5일제 근무를 시행 중인 점을 고려할 때 불가피한 대세로 보인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바로 도입해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견해를 달리 한다. 우리 경제는 IMF 위기를 완전히 극복했다고 볼 수 없다.

위기설이 다시 고개를 들 정도로 여건이 취약하다. 우리의 노동 강도와 생산성이 선진국과 비교해 떨어지는 현실도 문제다.

1인당 국민소득이 8천5백달러 수준인 우리가 3만달러를 넘는 선진국들과 같은 제도를 도입하겠다는 게 시기상조라는 측면도 있다.

기업들이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임금 인상 부담(대한상의 분석 14.4%)을 감내할 여건이 안될 때 기업들이 정규직 채용을 꺼려 직업의 안정성을 해칠 수도 있다.

이런 여러 이유로 충분한 시간을 두고 심도있는 논의를 거쳐 신중하게 접근하는 게 옳다고 본다. 제도 도입에 따른 충격을 분산하기 위해 10년여에 걸쳐 근로시간을 줄인 일본처럼 단계적으로 시행하는 방안을 선례로 삼을 만하다. 대상도 산업별.기업별 특성에 맞춰 자율적으로 결정토록 해야 한다.

또 법 개정에 앞서 격주 토요 휴무제나 변형 근로시간제 등을 확산시키는 노력이 우선돼야 할 것이다.

현행 법정 휴일이나마 제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관련 규정을 강화하고, 초과 근무수당을 안주려고 편법을 동원하는 사용자는 엄벌하는 등 제도적 보완책부터 강구하는 게 현실적인 개선책이다.

이런 수순을 밟기 위해 먼저 노동계는 총파업을 자제해야 한다. 근로시간 단축은 총파업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더구나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이런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것은 정치적 공세로 보일 수 있다.

정부도 급한 불을 끄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이 문제를 다뤄선 안된다. 정부 내의 충분한 토의와 우리 경제에 미칠 파급 효과에 대한 분석을 거쳐 원칙을 세우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협의를 해나가야 한다.

재계도 대결구도로만 몰고갈 게 아니라 노동과 삶의 질을 함께 고민하고 수용하는 상생(相生)의 자세를 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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