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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꾼 정상회담] 上. 평화를 이끈 결단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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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정치는 격동과 반전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 고비마다엔 정상회담이 있었다.

인종과 종교, 이데올로기와 민족갈등이 빚어낸 비극과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역사의 물줄기를 평화와 화해로 돌려놓은 대전환 뒤엔 정상들의 결단과 고뇌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은 오는 6월 12일부터 해방 이후 첫 정상회담을 갖는다.

이를 앞두고 역사를 뒤바꾼 세기의 정상회담들이 준 교훈을 세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역사적인 정상회담의 성공원인을 들라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정상들의 개인적 역량을 배제할 수 없다.

어떤 정상은 포용력과 인간적 매력으로 상대방을 감동시키기도 했고, 때로는 쾌도난마의 결단력으로 수많은 난관을 뚫고 협상을 타개했다.

◇ 인간적으로 호소한 저우언라이〓미국과 중국의 국교를 재개하기 위해 벌어진 1972년의 핑퐁외교. 그해 2월 베이징(北京)을 방문한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은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와 닷새 동안 여섯차례 만나 무려 20시간여 대화를 나눴다.

베트남전 종전과 대만에 주둔한 미군철수 등의 입장차가 그만큼 컸던 것이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회담을 진전시킨 원동력은 周총리의 인간적인 호소력이었다.

회담이 진행 중이던 어느날 밤, 周총리는 헨리 키신저 미 대통령 안보담당 보좌관의 숙소를 몰래 찾아갔다. 특별한 협상카드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는 "지금 중국 지도부에선 나만한 온건파가 없다.

내가 죽고 나면 양국 관계 개선은 어렵다" 며 측근들에게 숨겨왔던 암 투병사실을 키신저에게 털어놓았다.

周총리의 헌신성은 닉슨의 마음을 움직였다.

닉슨은 훗날 회고록에서 "周총리의 냉철하고 진지한 자세와 교섭력에 매료됐고 마침내는 존경하게 됐다" 고 술회했다. 94년 비밀해제된 회담 기록엔 닉슨이 소련 군사력에 대한 고급정보와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막기 위한 전략 등을 周총리에게 털어놓았다고 적혀 있다.

◇ 적진에 뛰어든 사다트〓4차 중동전쟁의 와중인 77년 11월,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은 주위의 만류를 무릅쓰고 적국의 심장부인 이스라엘의 텔아비브로 날아갔다.

아랍 동맹국들은 평화를 주창하는 사다트에게 '아랍의 반역자' 란 비난을 퍼붓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신념은 확고했다. 사다트는 이스라엘 도착 일성으로 "우리 영토에 태어난 아기들의 미소를 위해 이곳에 왔다" 고 말했다.

베긴과의 회담장에선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건설했던 것처럼 팔레스타인인들도 이스라엘 국경에 국가를 건설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고 호소했다. 이스라엘 국민들은 그의 용기에 감명받았다.

주변의 아랍국들도 적지에서 할 말을 다 한 사다트를 결국은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사다트의 용기어린 결단은 이듬해 캠프 데이비드 회담을 거쳐 79년 3월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중동평화협정에 조인하는 초석이 됐다.

사다트는 그뒤 2년만인 81년 이슬람 원리주의자의 총탄에 맞아 비운에 쓰러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뿌린 평화의 씨앗은 아랍민족과 유대 민족간의 전쟁에 종지부를 찍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 앞을 내다본 브란트〓독일 통일의 기반이 된 동.서독 정상회담도 결국 브란트 총리의 선견지명에 힘입은 것이었다.

서베를린 시장 재직 시절 베를린을 동서로 가르는 장벽이 설치되는 걸 지켜봤던 그는 68년 총리에 취임하자마자 신동방 정책을 제창했다.

동서의 냉전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에, 냉전의 꼭지점에 서 있던 서독의 신임 총리가 소련을 비롯한 동구 진영에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고 동독과의 관계 정상화를 모색한 것이다.

하지만 동독 체제를 인정하는 것은 동독 고립책을 펴오던 아데나워 전임 총리의 정책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기민.기사당은 브란트의 불신임안을 제출하며 격렬히 반대했다.

동.서독의 정상회담 중에도 브란트를 반역자로 몰아세우는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브란트는 결국 역사의 승리자가 됐다. 역사가 그의 선견지명을 입증한 것이다.

브란트는 신념을 굽히지 않고 동독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기반을 다져 나갔다. 그의 노력은 70년 역사적인 동.서독 정상회담의 실현과 뒤이은 동.서독 교류의 정착으로 결실을 보았다.

그로부터 20년 가까이 흐른 89년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베를린 장벽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이제 독일 국민은 그토록 거센 비난을 받았던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통일 독일의 원동력이 됐음을 아무도 부인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는 독일 통일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는 것이다.

예영준.이상언.장정훈 기자

◇ 도움말 주신분〓문정인(文正仁)연세대 교수, 서병철 (徐丙喆)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실장, 서진영 (徐鎭英)고려대 교수, 손주영 (孫主永) 한국외대 교수, 이종택 (李鍾澤) 명지대 교수 <가나다 순<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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