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비루한 여행 경력이지만 그래도 기억에 남는 여행이 있다. 지난해 겨울 대중교통으로만 다녀왔던 4박5일 코스였다. 동해 바다를 기차 안에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시작이었다. 인터넷으로 강원도와 경상도 쪽에서 안 가본 곳을 대충 목적지로 삼고 출발했다. 차가 없으니 경기도에서 청량리역까지 가는 것만 해도 쉽지가 않았다. 미련한 인간이 짐 많이 지고 다닌다고 꾸역꾸역 집어넣은 가방을 원망하며 여행길에 나섰다.
그런데 가보고 나서야 짐뿐만 아니라 코스도 아주 미련하게 잡은 걸 알았다. 강원도 정동진과 횡계를 거쳐 정선으로, 다시 경상도 청송 쪽으로 일정을 잡았는데 모두 깊은 산골 마을들이었던 것이었다. 기차에서 내려 시내버스로 다시 마을버스로, 또 시외버스로 혹은 마을버스가 끊겨 택시로 한 스무 번쯤 타고 내리고 갈아타고 하는 일이 반복됐다.
차를 가지고 왔으면 드라이브 즐기며 편했을 길을 낑낑거리며 다니긴 했지만, 확실히 방법이 달라진 여행은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한참을 기다려 서너 번 차를 갈아타고 한밤중에 도착한 청송 옛날 갑부 댁의 아흔아홉 칸 한옥에선 TV도 없고 웃풍이 서늘한 온돌방에서 심심해서 뭘 하나 고민할 겨를도 없이 지쳐 떨어져 오랜만에 달고 맛난 잠을 잤다. 정선 아우라지 마을까지 다니는 마을버스에 탔더니 기사님이 “아줌마가 올 때가 됐는데…” 하며 손님을 기다리다 태웠다. 읍내 학원 나가는 아이의 버스가 안 와서 차를 타면서도 초조해하는 손님한테 그 기사분, “때가 되면 오것지요” 하면서 여유 있는 웃음으로 그를 달랬다. 내릴 땐 묻지도 않았는데 내일 아침 몇 시까지 나와야 이 차를 탈 수 있다고 우리에게 당부해줘 훈훈했다. 정동진에서 강릉 가는 버스 정류장에는 벽을 빼곡하게 메운 친구들과 연인들의 낙서들이 기다리는 지루함을 잊게 했다. 대관령 목장에선 젊은 연인들의 차를 얻어 탔다가 눈길에 차 바퀴가 빠지는 바람에 산 위에서 벌벌 떨며 차를 밀다 간신히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생전 처음 본 그들과 껴안고 기뻐하기도 했다.
수없이 거쳐간 시외버스 정류장의 모습들은 일이십 년 전에 봤던 것들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나날이 화려해지는 서울과 수도권과는 다르게 불과 몇 시간 되지도 않는 거리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나 다르다. 차를 타고 휙 지나가며 번잡한 맛집들을 거쳐가는 구경꾼의 입장이었을 때 지방은 그저 일상을 벗어나고 먹고 즐기기에 이색적인 풍광을 제공하는 관광지일 뿐이었다. 사소하게 교통편을 바꿨을 뿐인데, 뭔가 다른 시각에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느끼고 바라보게 만든 것 같았다. 별것 아닌 경험이었지만 그 겨울여행에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이윤정 문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