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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44>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44>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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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호 10면

4·19 혁명에 관한 좌담회에 청록파 시인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왼쪽 둘째부터 박두진, 박남수, 조지훈, 박목월. [중앙포토]

정지용의 시적 천재성은 한국시 사상 불후의 명시로 꼽히는 ‘향수’를 겨우 24세 때 지었다는 사실로 입증된다. 시를 잘 지었을 뿐만 아니라 남의 시를 보는 눈도 탁월했다. 그래서 여러 걸출한 시인들을 그의 손으로 시단에 등장시켰다는 점도 그의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1939년 ‘문장’을 통해 정지용의 추천으로 한꺼번에 등단한 조지훈·박두진·박목월·박남수·이한직·김종한 등 여섯 시인이 대표적이다.

그들 가운데서 김종한은 해방되던 해 30세로 요절했고 이한직은 사적인 일로 일찍 붓을 꺾었지만 다른 네 시인은 20세기 막바지까지 한국 시단을 대표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지훈·박두진·박목월이 해방 이듬해 ‘청록집’을 내면서 한국 현대시의 상징으로 자리를 굳혀간 데 비해 박남수의 문학과 삶의 궤적은 그들만큼 평탄치 못했다. 1918년 평양에서 출생, 일본 주오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뒤 귀국해서 시단에 얼굴을 내민 박남수는 중앙문단의 손짓에도 고향인 평양을 떠나지 않았다.

일제 말의 암흑기와 해방 직후의 혼란기에도 평양에서 우리말과 글의 순수성을 지키는 데 주력한 것이다. 시 ‘광부’가 인민의 생활을 어둡게 묘사했다고 문제 삼는 등 북한 정권이 그의 문필 활동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은 것이 51년 1·4후퇴 때 남하하게 된 동기였다. 말 그대로 ‘적수공권’의 월남이었다.

그래도 남쪽 문단에는 등단 동기생을 비롯, 친분관계를 쌓은 문인들이 많아 활발한 문단활동을 펼 수 있었다. 54년에는 월간 순문예지 ‘문학예술’을 창간했고, 57년에는 조지훈·유치환 등과 함께 한국시인협회 창립을 주도하기도 했다. 한동안 ‘사상계’ 상임편집위원으로 일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나 경제적으로는 안정을 찾지 못했다. 이미 고려대ㆍ연세대ㆍ한양대 교수로 탄탄한 직업을 가지고 있던 ‘청록파’의 세 시인은 박남수에게 안정된 직업을 구해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보람이 없었다.

꼭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박남수는 60년대 후반 가족들을 먼저 미국으로 이민을 보냈다. 그 뒤 여러 해 혼자 살게 된 박남수는 그 특유의 온화한 얼굴 한구석에 늘 쓸쓸함과 우울함이 감돌았다.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일절 털어놓지 않는 성격이었으므로 아무도 그 까닭을 알지 못했다. 75년 1월 박남수는 박목월이 주재하던 월간 시전문지 ‘심상’에 고국에서의 마지막 시를 발표한다. 제목은 ‘옛 벗을 그리며’였는데 ‘무제(無題)’ 1, 2, 3 등 3편으로 나누어 세상을 떠난 세 친구를 추모하는 시였다. 등단 동기생인 김종한과 조지훈, 그리고 같은 평양 태생으로 함께 월남한 희곡작가 오영진이었다.

그 세 편의 시는 박남수가 조만간 고국을 등지게 되리라는 예고였다. 고국을 떠나기에 앞서 먼저 세상을 떠난 세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그로부터 몇 달 뒤 박남수는 홀연 가족이 살고 있는 미국 뉴욕으로 떠났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아 전송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아니 꼭 한 사람이 있었다. 박목월이었다. 그 전송 장면은 다분히 극적이었다. 박남수가 떠난 지 서너 해 뒤 미국 방문 길에 뉴욕에서 플로리다로 이사해 살고 있던 박남수를 찾은 허만하가 그에게서 들었다는 그때 이야기는 이렇다.

박남수가 수속을 끝내고 출국을 기다리는데 누군가 달려와 박남수를 부여안았다. 박목월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 박남수가 미국으로 떠난다는 이야기를 누구에게선가 전해 듣고 헐레벌떡 공항으로 달려온 것이다. 박목월은 뭔가 주고 싶었던 듯 주머니를 여기저기 뒤졌으나 경황 없이 달려온 까닭에 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저고리 안주머니에서 흰 사각 봉투 하나를 꺼내 슬그머니 박남수의 손에 쥐여주었다. 박남수가 열어보니 그 속에는 구두 티켓 한 장이 달랑 들어 있었다. 박목월의 마지막 우정 표시였다.

미국에 정착한 뒤에도 박남수의 시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한국시와의 유일한 통로는 전봉건이 매달 보내준 월간 시전문지 ‘현대시학’이었다. 열심히 읽고 시혼을 불태워 ‘사슴의 관’(81년) ‘어딘지 모르는 숲의 기억’(91년) ‘서쪽, 그 실은 동쪽’(92년) 등 고국에서 잇따라 시집을 펴냈다.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슬퍼하며 쓴 ‘그리고, 그 이후’(93년)가 그의 마지막 시집이었다. 박남수는 그 이듬해 76세를 일기로 미국 뉴저지에서 숨을 거뒀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문학 평론가로 추리소설도 여럿 냈다. 196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동네에서 생긴 일』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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