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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는 아름답다] 3.남편·자녀도 함께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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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지난 13일 오전 일산신도시 아파트 단지내의 한 소아과의원. 진료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환자보호자 가운데 절반 가량이 아빠들이다.

이 시간이면 직장에서 한창 분주할 아빠들이 엄마 대신 보채는 아기를 안쓰러운 표정으로 앉고 달래고 있는 것이다. 아기를 안은 솜씨도 보통이 아니다. 전혀 어설프지 않은 게 평소 몸에 밴 모습이다.

감기 기운이 있는 딸아이(5)를 데리고 온 이경석(34)씨는 "어젯밤 야근을 하고 들어왔는데 아내가 자동차학원을 간다고 해 혼자 아픈 아이를 데리고 왔다" 고 말했다.

이 병원 조인희(21)간호사는 "예전에는 엄마 대신 할머니가 데리고 오는 경우가 많았으나 요즘은 아빠가 오거나 심지어 할아버지가 보호자인 경우도 있다" 고 전했다.

그날 오후 'E마트' 일산점의 식품매장. 혼자서 쇼핑카트를 끌고 야채.생선코너 등을 돌며 양파.감자.갈치 등을 카트에 담는 남자들이 쉽게 눈에 띈다.

나이는 대략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 옷차림새나 분위기를 봐선 영락없이 한 가정의 가장이 대부분이다.

매장 종업원은 "아빠들이 퇴근길에 혼자 장을 보는 사람들이 많다" 며 "반찬코너에선 직접 맛을 보기도 하면서 당당하게 물건을 사간다" 고 말했다.

몇년 전만 해도 남편이 아내와 함께 쇼핑에 나서면 주변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지만 요즘은 아예 '나홀로 장바구니 남편' 도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병원이나 식품매장뿐 아니라 놀이방에 아이를 맡기는 아빠나 한손에 쓰레기봉투를 든 남편들의 모습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결혼 3년차인 맞벌이부부 손무호(31).강미경(31)씨. 이들의 보금자리인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아파트의 안방 침대 옆에는 '우리부부의 약속' 이란 액자가 걸려 있다.

아내 강씨는 "신혼 첫날밤 남편 손씨의 제안으로 앞으로 꾸려 나갈 가정의 사랑과 평화를 위해 약속한 것을 워드로 정리한 것" 이라며 "마음가짐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침실에 걸어두었다" 고 설명했다.

주내용은 서로 믿고 존중하며 가정의 구성원으로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무호는 미경에게' '미경은 무호에게' '무호와 미경이의 자녀에게' 등 3개 항목으로 나뉘어 있다.

'무호는 미경이가 서운한 마음이 들지 않게 하겠다' '미경이는 무호에게 자주 칭찬을 해주겠다' '두사람이 자녀의 미래를 위해 부모의 도리를 충실히 하겠다' 는 내용이 담겨 있다.

손씨 부부는 이달 초 결혼 3주년을 맞아 매월 둘째 토요일을 '가정의 날' 로 정했다.

이 역시 남편 손씨가 직장선배에게 배워 흉내낸 것인데 일종의 아내에게 봉사하는 날이다. 남편은 이날 아내의 힘으로 부족한 청소나 큰 빨래 등을 해결해 주고, 아들 성민(2)과 아내를 위해 별미요리를 준비한다.

손씨는 "맞벌이하면서 가사일을 전적으로 아내에게 맡긴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 이라며 자신은 앞으로도 아내뿐 아니라 자녀들이 신바람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아주면서 가정의 행복을 추구할 것이라고 한다.

분당신도시 효자촌에 사는 양은희(37)주부는 이달 초 평생 잊지 못할 생일 잔칫상을 받았다.

남편과 함께 맞벌이를 하느라 남들처럼 돌봐주지 못해 항상 마음에 걸렸던 외아들 진성(중1)이가 생일상을 차려 놓고 귀가하는 엄마를 기다렸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자신이 아들 생일잔치 때 해준 것처럼 집안을 온통 풍선으로 장식해 놓고 케이크와 과자를 준비해 엄마를 맞이하더라는 것이다.

양씨는 "평소에도 쓰레기 분리수거와 신발정리는 자신의 일로 도맡아 하는 아들이 대견스러웠는데 이 정도로 엄마를 챙겨줄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다" 고 말했다.

네살.다섯살짜리 두 아들을 둔 이혜영(34.서울 양천구 목동)주부. 이씨는 식탁을 차릴 때 물과 숟가락을 준비하지 않는다.

엄마가 "얘들아, 밥먹어라" 고 외치면 작은아이는 각각의 물컵과 숟가락을 준비해 식탁에 앉고, 큰아이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식탁에 올리고 식사를 시작한다.

이씨는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엄마의 가사를 나눠 하는 습관을 들이는 중" 이라며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더 힘들고 의미있는 일을 나눠줄 생각" 이라고 말했다.

한국가족상담교육연구소 육계숙(가족학)박사는 "아직까지 '생각따로 몸따로' 인 남편들이 많다" 며 "남편이 집안 일을 분담해 도와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주부에게 가사를 전담시키거나 대부분을 떠맡기는 것이 남자들" 이라고 말한다.

이어 그는 "일부 주부들이 아직까지 전통적인 가부장적 남성상에 얽매여 남편이나 자녀들에게 집안일을 나눠주지 않고 자신의 일인 양 고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고 덧붙였다.

특별취재팀〓고종관.유지상.최지영.박혜민 기자, 본사 주부통신원

<글 싣는 순서>

①움직이면 '살맛' 난다

②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③남편.자녀도 함께 한다

④내 건강도 중요해

⑤찾아보면 길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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