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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코펜하겐 회의의 엄정한 과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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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섀클턴 탐험대가 남긴 사진들은 당시 미지의 대륙이었던 남극의 모습을 생생히 전달한다. 떠다니는 빙산, 좌초한 인듀어런스호, 고요하다 못해 공포스러운 웨들 해의 풍광, 한때 물개 사냥터였던 엘리펀트 섬의 장엄한 위용은 대자연의 경이를 새삼 일깨워 준다. 날씨도 추워졌는데 때 아닌 남극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오늘날 남극이 지구 환경의 바로미터이기 때문이다. 남극의 오존층 파괴도 문제이거니와, 갈수록 줄어드는 남극 빙산도 환경위기의 대표적 증거로 지목된다.

이쯤 하면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독자들은 이미 짐작하셨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덴마크 코펜하겐에서는 제15차 유엔기후변화협약당사국총회(COP15)가 열리고 있다. 18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총회는 기후 재앙을 막기 위해 세계 105개국 정상들이 참석하는 역사적 회의다. 이 회의에는 세 가지 코드가 담겨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첫번째는 환경학이다. 최근 남극조사과학위원회(SCAR)는 미증유의 위기에 직면한 지구 기후에 대해 강력히 경고한 바 있다. 현재의 온난화 추세가 지속될 경우 2100년에는 해수면 수위가 높아져 인도양 몰디브나 태평양 투발루 등 섬나라가 물에 잠기고, 런던·뉴욕·상하이 등 대도시는 홍수 예방에 수십억 달러를 지불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세계 인구의 10%인 6억 명 이상이 환경난민으로 전락한다는 게 이들의 섬뜩한 전망이다.

두번째는 정치학이다. 상황이 이러한 만큼 코펜하겐 회의에선 교토의정서를 대체할 새로운 기후협약을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선진국과 개도국의 견해 차이와 국가이기주의로 인해 전망은 불투명하다. 분명한 것은 협상의 핵심을 이루는 기후 변화 대책의 비용과 1조t 이상의 이산화탄소 배출권의 분배에 대한 선진국과 개도국 간의 합의를 마련해야 할 과제를 코펜하겐 회의는 안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정부는 지난달 2020년 온실가스 배출량을 통상적 배출전망치(BAU)보다 30% 감축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세계 9위의 온실가스 배출국이자 세계 10위권의 경제국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이런 목표 수치에는 아쉬움이 없지 않다. 물론 우리 경제의 현실적 여건을 고려한 것이지만, 내년도 G20 회의 개최국답게 이번 회의에서 더욱 전향적 태도로 의미 있는 역할을 해줘야 할 필요가 있다.

세번째는 인간학이다. 기후의 미래에 대해선 비관론과 낙관론이 공존한다. 일각에선 지구온난화 위기가 과장됐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온실가스로 말미암아 온난화가 더 이상 방치될 수 없는 한계에 도달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려운 과학적 진실인 것으로 보인다. 문제의 핵심은 과연 어떤 처방으로 기후 변화를 포함한 지구적 환경위기에 대처할 것인가에 있다.

자연과 환경을 대하는 태도 및 사고방식의 근본적 변화가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과 자연을 분리시키고 자연을 인간의 욕구충족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한 환경위기는 지연될 뿐이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과 인간이 하나의 생물권을 이루는 동등한 존재라는 새로운 인간학적 자기계몽의 엄정한 과제 앞에 우리 인류는 지금 서 있다고 봐야 한다. 이 자기계몽은 좌파와 우파를 모두 아우르는 인식틀이자 지속가능한 지구를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섀클턴의 모험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그가 이끌던 인듀어런스호가 침몰했을 때였다. 섀클턴은 자신의 짐을 정리하면서 성경에서 몇 페이지를 뜯어 가슴에 품었다. “얼음은 뉘 태(胎)에서 났느냐, 공중의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 물이 돌같이 굳어지고, 해면이 어느니라.” 성경 ‘욥기’의 한 구절이다. 신학적 문맥을 떠나 나는 이렇게 해석하고 싶다. 얼음과 서리와 바다가 지구의 또 다른 주인인 것처럼 우리 인간도 지구의 한 부분일 따름이다. 아름다운 생명의 지구를 지켜야 할 책무를 인류는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믿는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