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 개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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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호 33면

1948년 6월 20일. 나치스 정권에서 유통되던 라이히스마르크가 돈으로서 생명을 잃었다. 다음 날부터 도이체마르크가 독일의 새 화폐가 됐다. 라이히스마르크와의 공식 교환 비율은 10대 1. 하지만 채권채무 조정, 잉여화폐 처분 등 여러 절차가 뒤따랐기 때문에 결과적으론 라이히스마르크 100에 도이체마르크 6.5로 교환된 셈이었다.

남윤호의 시장 헤집기

패전국 독일에서 일어난 악성 인플레, 이게 화폐 개혁의 배경이었다. 나치스가 전비 조달을 위해 마구 찍어댄 라이히스마르크는 전후 초인플레를 불러왔다. 물건 값은 돈으로 셈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서민들에겐 라이히스마르크 대신 담배가 돈이었다. 옷 한 벌에 담배 몇 갑, 버터 한 덩어리에 담배 몇 개비 식이었다. 이를 해결하려면 역시 화폐 개혁밖에는 길이 없다는 데 서방 연합국은 합의했다.

물론 독일의 지도자들도 나름대로 화폐 개혁안을 마련해 두고는 있었다. 화폐 개혁 두 달쯤 전에 나온 ‘홈부르크 플랜’이 그것이다. 그러나 세부 사항은 미국과 영국이 대폭 수정했다. 새 화폐를 어디서 인쇄하고, 어느 기관이 주도해 화폐 개혁을 하느냐와 같은 실무 절차도 새로 짜였다.

그런데 미국과 영국은 소련과 전혀 상의하지 않은 채 비밀리에 전격적으로 해치웠다. 비밀 유지를 위해 도이체마르크는 미국에서 인쇄돼 프랑크푸르트의 라이히스방크(독일의 전 중앙은행)로 공수됐다. 실시 지역도 미국·영국·프랑스 삼국이 점령하고 있던 ‘트라이 존’, 즉 서독으로 한정했다. 소련 점령 지역(동독)을 뺀다는 것은 곧 동서 분단을 감수하겠다는 뜻이었다. 소련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그 보복으로 화폐 개혁 나흘 뒤 서베를린을 봉쇄했다. 이에 대항해 나온 게 미·영의 서베를린 대공수 작전이다.

화폐 개혁의 핵심은 통화량과 실물경제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었다. 점령국의 계산에 따르면 당시 독일의 통화량은 전쟁 전의 10배로 늘어난 데 비해 물자 생산은 반 토막 나 있었다. 그 균형점을 찾아 인플레를 진정시키고 시장경제가 제대로 돌아가도록 하자는 게 화폐 개혁의 목적이었다.

물자가 극단적으로 부족해 악성 인플레가 일어난 상황에서 적절한 통화량을 추정한다는 것은 당시로선 대단한 도박이었다. 다행히 화폐 개혁의 효과는 금세 나타났다. 도이체마르크가 돈으로서 신뢰를 얻으면서 신용질서가 곧 회복됐다. 시장 원리가 스스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효율적인 자원 분배가 이뤄지게 됐다는 것이다.

가격 통제를 할 필요도 없어졌다. 소비재 가격이 먼저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어 기계류와 같은 자본재 가격도 자유화됐다. 이게 서독의 공업 생산을 촉진시켰다. 그래서 화폐 개혁이 독일 경제 부흥의 초석이 됐다고 보는 학자가 많다.

반면 북한의 화폐 개혁은 사뭇 달라 보인다. 시장을 살리는 게 아니라 약화시켜 국가 통제에 예속시킬 의도라고 한다. 그렇다면 경제 정책이 아니라 통치 차원의 권력적 조치인 셈이다. 초보적이나마 존재하고 있던 시장을 타격하는 친위 금융 쿠데타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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