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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살 미실이 난을 일으키고 칼솜씨 뽐내며 전장을 누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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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사극을 역사 왜곡의 원흉이라고 성토하려는 뜻은 없다. 어차피 ‘픽션(fiction)’이라는 전제를 깔고 만들어진 ‘허구의 세계’인 것이다. 때문에 사실에 충실하지 않았다고 면박을 주는 것 자체가 민망한 일이다. 그렇다면 할 일은 제대로 된 역사를 찾아 나름의 시각을 갖추는 일이다. <선덕여왕>의 진짜 역사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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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는 TV드라마 <선덕여왕>의 주요 등장인물인 비담·미실과 포스터. 많은 사람이 드라마와 역사는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지만 시청자들로서는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허구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드라마 <선덕여왕>이 대단한 인기다. 중요한 등장인물인 미실이 마지막을 고하는 부분에서는 시청률 50%를 바라볼 정도였다고 한다. 인기 드라마 한 편이 방송사 하나를 먹여 살릴 수 있고, 더 나아가 해외에까지 수출돼 대한민국에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된다고 하니 일단 좋은 일이다.

<선덕여왕>, 드라마와 역사의 차이 #악의 축으로 묘사된 세종·하종·보종, 드라마 봤다면 무덤에서 뛰쳐나올 일

사극의 경우 더욱 각별한 의미를 담을 수도 있다. 단지 재미있는 드라마 한 편이 나왔다는 것뿐 아니라 관련된 역사를 발굴했다는 의미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역사학자의 입장에서는 드라마 한 편 덕분에 당시의 역사에 대중의 관심이 생기는 터이니 굳이 싫을 것은 없다.

누가 보아주지도 않는 역사논문이나 그나마 낫다는 역사 관련 책보다 사극의 영향이 훨씬 더 큰 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역사에 대한 관심 증대라는 측면에서 공로를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조심해야 할 점이 있다. 역사란 어떠한 일이 있었다는 단순한 사실을 보여주는 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에서 어떤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때문에 역사적 사실의 전개 방향에 따라 현재를 사는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니 있지도 않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을 만들어 놓고, 그런 데서 현재의 교훈을 찾자고 한다면 그것을 조작해낸 사람에게 놀아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역사와 사극의 차이는 이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인식하느냐 하는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역사는 많은 사람의 운명을 좌우할 문제를 결정할 때 교훈을 찾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는 데 신경을 쓴다. 그래서 역사학은 ‘알고 싶어하지 않는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까지 한다. 이에 비해 드라마를 만드는 측에서는 많은 사람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만들어 팔면 그만이라는 발상이 우선이다. 그래서 노골적으로 ‘듣고 싶어하는 거짓’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생각으로 드라마를 만들다 보니 재미를 위하여 억지스러운 상황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이 드라마와 역사는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그 시대 전문가가 아닌 시청자들로서는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허구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자기도 모르게 드라마가 만들어낸 허구와 역사적 사실을 혼동하게 된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돋보이는 등장인물 중 하나가 비담이다. 비담은 문노를 만나 강하고 명민한 무사로 성장한다. 그렇지만 어렸을 적 버림받고 떠돌던 경험 때문에 사람을 대하는 데도 거침이 없다.

그래서 진골귀족들에게도 말을 놓는다. 심지어 보통 진골이 아니라 진지왕의 손자인 김춘추를 두들겨 패기까지 한다. 요즘 사람들의 눈에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매력적인 인물로 비칠 수 있다. 그래서 드라마 속 등장인물인 비담의 인기도 웬만한 주연급에 밀리지 않는다.

하지만 신라 때 정말 이런 인물이 있었다면 그는 아마도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는 경직되기로 유명한 골품제를 바탕으로 하는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 근본도 모르는 천한 자가 왕손을 때렸다면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정신이 나간 자가 아닌 한, 진골귀족인 화랑들에게 말을 놓으며 기분 나는 대로 대할 생각을 하지도 못하는 것이 정상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많은 사람이 신라를 비롯한 전근대시대도 지금과 별로 다를 것 없이 ‘민주화한 사회’쯤으로 여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비담뿐 아니라 장보고나 이순신 같은 역사적 위인들을 다룬 드라마에서도 주인공들은 신분제를 없애려고 노력했던 선구자의 면모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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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의 치적 중 하나로 알려진 첨성대. 분황사니 황룡사 9층탑이니 하는 신라시대 대표적 유적이 선덕여왕 대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선덕여왕의 지혜를 알리는 몇 가지 일화 외에 이름값만큼의 업적은 눈에 띄지 않는다.

이쯤 되면 거의 근대사상가 수준의 사고방식이다. 비담의 경우, 그가 만약 드라마에 나온 대로 행동했다면 사상가가 아니라 혁명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차후에 비담이 그런 혁명적 사고방식 아래 반역을 시도하는 것으로 그려질지도 모른다. 근대적 사상을 가진 인물이 그렇게나 많았다면 왜 한국사회의 근대화는 이다지도 늦었을까?

그러니 이런 신분제가 깨져 나가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그런 제도를 없애는 근대화가 무슨 의미를 갖는지 알 리 없다. 하물며 지금 대한민국 사회가 이루어 놓은 민주주의가 얼마나 많은 시간 피와 땀을 흘려 이루어낸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할지 모른다.

이쯤에서 드라마 <선덕여왕>이 보여주는 이야기와 역사적 사실이 얼마나 다른지 짚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50부작에 이르는 드라마 전체를 한정된 지면에서 일일이 다 비교해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 특히 눈길을 끌었던 미실의 반란에서 죽음에 이르는 내용에 초점을 맞추어 보기로 하자.

드라마에서 미실은 남편 세종과 충직한 부하인 칠숙·석품 등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으려다 실패해 대야성으로 피신한다. 거기서 본격적인 내전으로 접어들게 될 단계까지 갔지만, 신라가 백제의 위협을 받게 되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살한다. 역사 기록과 맞추어 보면 이런 시나리오가 나올 수 있을까? 미리 해명해 두고 넘어갈 것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역사 기록은 <화랑세기>를 말한다. <화랑세기>를 두고 후세의 조작이라는 주장이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억지 주장이 많은 데다, 설사 조작이라 하더라도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드라마가 인용한 기록과의 차이다. 즉, 드라마가 의지한 역사 기록이 <화랑세기>이므로 어쩔 수 없이 비교 대상이 되는 것이다.

미실이 현재로서는 <화랑세기>에만 등장하는 인물이니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비교해 보면 우선 사실상의 주인공 역할을 했던 미실에 대한 묘사부터 문제다. 사실을 따지자면 드라마 속의 미실은 인간이 아닌 마녀였어야 한다. 미실이 활동했던 연대만 따져보아도 간단하게 그 점이 드러난다.

미실은 진흥왕과 정을 통하고, 사다함과 서로 좋아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무리 늦춰 잡아도 560년대 초반이다. 이때의 미실이 10대 후반이었다고 하더라도 칠숙·석품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던 진평왕 53년인 631년에는 80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된다. 인간이라면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아직도 미모를 간직한 여인일 수 없다.

빈첩(嬪妾)의 도는 색공(色供)에 있다 또 <화랑세기>에 나타난 미실은 미색이 뛰어나 여러 남자들이 좋아했던 ‘여자’였다. 미실 자신의 말로도 “빈첩(嬪妾)의 도는 색공(色供)에 있다”고 할 정도였으니 그 성향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남자 못지않은 칼솜씨를 뽐내며 전장을 누비었다는 기록 따위는 없다.

현실에서 남자 뺨치게 싸움을 잘하는 여자가 여러 남자가 죽고 못살 정도로 여자로서의 매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런 미실을 못하는 것 없는 슈퍼우먼으로 변신시킨 것이 이 드라마다. 소설이나 드라마 속에서는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미실이라는 인물이 인기를 끄는 배경에는 이른바 ‘페미니즘’도 작용하고 있다.

‘남자들을 쥐고 흔드는 강력한 여자’라는 캐릭터는 지금 사회에서 남자들과 경쟁하려 하는 여자들에게는 일종의 로망이다. 더욱이 드라마를 시청하는 시청자의 절대다수는 여자다. 역사 속에서 그런 여자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많은 여성이 선망을 넘어 열광하게 마련이다.

그런 캐릭터를 만들어 작품에 넣으면 인기를 얻을 수 있는 확실한 요소 하나를 확보하는 셈이다. 인기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싶어하는 작가들이 역사왜곡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런 인물을 조작해내기를 마다할 리 없다. 알고 보면 역사가 왜곡되는 동기는 별 것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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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은 여왕이기 이전에 신라가 삼국통일을 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한 왕으로 꼽힌다. 앞으로의 <선덕여왕>이 다뤄나갈 부분인 만큼 어떻게 그려질지 궁금하다. 경주의 선덕여왕릉.

몇몇 사람이 원하는 역사와 인물을 만들어 내고, 많은 사람이 그렇게 조작된 내용을 사실처럼 믿게 되면 역사 왜곡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미실뿐 아니라 드라마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과 그 인물들 사이의 기본적 인간관계도 기록에 나와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드라마에서는 미실을 축으로 하여 그 남편인 세종, 세종의 아들인 하종, 동생 미생, 정부인 설원과 그 아들 보종, 충직한 부하 칠숙과 석품이 한 편을 이룬다. 그 반대편인 선덕여왕 측에는 국선 문노와 진지왕의 후손인 용춘과 춘추, 김유신 가문, 알천이 있다. 그러나 <화랑세기> 기록에는 이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우선 미실의 남편이었던 세종에 대한 평가부터 다르다. 미실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살았다는 내용은 드라마와 같으나, 세종은 왕에게 충성스러웠다고 한다. 세종의 인품에 대해서도 드라마와는 전혀 다르게 묘사된다. 평생토록 한 사람도 책망하지 않았고, 공평한 판결을 하여 진실로 화랑 중의 화랑이었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

그런 세종을 드라마에서는 탐욕스러운 귀족 기득권 세력의 우두머리로 묘사했다. 하종에 대해서도 그렇다. 드라마 속의 하종은 머리는 텅 빈 채 욕심만 차리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화랑세기>에는 “공은 어려서부터 사람을 잘 가렸고, 정이 치우치지 않아 많은 사람의 신망을 얻었다”고 기록돼 있다.

김대문의 아버지로부터는 “지금 이 같은 효자, 충신은 없다”는 칭찬까지 받았다. 보종 역시 다르지 않다. <화랑세기>에는 “성품이 청아했고 정이 많았다. 사람들을 위하여 웃고 울었으며, 온화함과 순량함은 마치 부녀와 같았다. 사람들이 병들어 고통받는 것을 보면 마치 자기가 아픈 것처럼 여겼고, 새와 짐승에 대해서도 그러하여 한 마리의 벌레나 한 포기의 풀도 해친 적이 없었다”고 되어 있다.

또 드라마에서는 유신을 못 잡아먹어 안달하는 보종이지만, <화랑세기>에는 완전히 반대로 되어 있다. 유신 스스로 낭도들에게 “선(仙)을 배우고자 하면 보종을 따르고, 나라를 지켜 공을 세우려면 나를 따라야 할 것”이라며 보종의 인품을 치켜세우고 있다. 드라마에서는 이런 인물을 어머니 미실의 앞잡이가 되어 온갖 흉악한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인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미실을 이른바 ‘악의 축’으로 해서 기득권을 가진 귀족세력의 패거리를 만들어야 했으니, 세종·하종·보종 등의 인품까지 바꿔 놓은 것이다. 당사자가 드라마를 본다면 무덤에서 뛰쳐나오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또 이런 구도를 설정하기 위해 반대편 인물들의 성품과 인간관계도 조작해야 했다.

유신과 미실의 관계도 상당히 친밀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미실이 유신에게 “나의 아들은 어리석고 약하니 도와주기 바란다”고 하자, 유신은 “신이야말로 실로 어리석습니다. 형은 비록 약하나, 그 도(道)는 큽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라며 미실을 안심시킨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하는 관계가 아니었음을 쉽게 알아 볼 수 있다.

드라마 속에서 선덕여왕을 보호하기 위해 미실 일파와 대립한 것처럼 나오는 문노도 <화랑세기>에는 다르게 나타난다. 기록에서 문노는 세종에게 충성을 바쳤다고 한다. 그래서 미실에게도 충성을 바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문노는 미실의 명령으로 설원과 미생에게 스승으로 받들어졌으며, 또 미실의 덕을 입어 설원으로부터 풍월주의 지위를 이어 받았다.

혼인도 미실의 동생인 윤궁과 했다. 말년에는 윤궁에게 휘둘리며 살았다고 한다. 드라마에서 미실의 앞잡이 노릇을 하다 천명공주를 죽인 것으로 나오는 대남보도 <화랑세기>에는 천명공주의 남편 용춘이 총애하던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대남보 역시 용춘에게 진심 어린 충성을 바쳤다고 한다.

이 정도면 <화랑세기>의 위작 여부를 떠나 드라마가 역사 기록과는 완전히 다른 인간관계를 창작해 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마지막 반란 장면도 실제의 역사에 나타날 리 없다. 드라마 속에서 미실의 반란에 충직한 부하로서 참여한 칠숙과 석품에 관한 기록만 보아도 그 점을 알아 볼 수 있다. 그 기록을 보자.

“진평왕(眞平王) 53년 여름 5월 이찬 칠숙(柒宿)과 아찬 석품(石品)이 반란을 꾀하였다. 왕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칠숙을 붙잡아 동시(東市)에서 목을 베고 아울러 구족(九族)을 멸하였다. 아찬 석품은 도망하여 백제 국경에 이르렀다 처와 자식을 보고 싶은 생각에 낮에는 숨어 있고 밤에는 걸어 총산(叢山)까지 돌아와 한 나무꾼을 만나 옷을 벗고 해진 나무꾼의 옷으로 갈아입고 나무를 지고 몰래 집에 이르렀다 잡혀 처형되었다.”

이것이 전부다. <삼국사기>에 칠숙과 석품이 등장하는 장면은 이것뿐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칠숙과 석품은 반란을 일으켰다 진압된 것이 아니라, 사전에 발각되는 바람에 반란은 일으켜 보지도 못하고 체포된 것이다. 드라마에서 곧 전개될 것으로 보이는 비담의 반란. 나중에 반란을 일으킨 비담에 관한 기록은 상대적으로 풍부한 편이다. 비담의 반란에 대한 기록은 이렇다.

“선덕왕(善德王) 14년 겨울 11월에 이찬 비담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16년(647) 봄 정월에 비담과 염종(廉宗) 등이 말하기를 ‘여자 임금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 하여 반역을 꾀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8일에 왕이 죽었다. 진덕왕(眞德王) 원년(647) 정월 17일 비담을 목베어 죽였는데, 그에 연루되어 죽은 사람이 30명이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오는 내용은 이 정도뿐이지만, ‘김유신열전’에는 더 많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이야기는 오래 전 김유신과 연에 관련된 설화로 어린이용 동화책 등에서 제법 많이 소개되기도 했다. 반란군인 비담과 진압군인 김유신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김유신 진영에 별이 떨어지자 많은 군사가 이것을 보고 불길하다 하여 사기가 저하되자 김유신이 연에 불을 붙여 띄워 올려 군사들의 사기를 되살렸다는 바로 그 이야기다.

다만 역사 기록에서 참고할 것은 “비담 등이 패하여 달아나자 추격하여 목을 베고 9족(族)을 죽였다”는 내용이다. 뒤의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 잠시 기억 속에 넣어 둘 이야기다.

글 이희진 역사학자, 전 국사편찬위원회 구술자료연구책임자 [dk71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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