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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풍류탑골 (9)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9.'만다라'의 슬픔

탑골을 하는 동안 가끔 나도 모르게 따라 울게 만든 사람이 있다면 소설 '만다라' 의 작가 김성동 선생이다.

김선생은 대개 많아야 대여섯 명 정도의 사람들과 함께 왔는데 별로 말을 안했다. 일행의 말을 조용히 들어주며 그야말로 단아한 선비처럼 술을 마시곤 했는데 뒤에 보면 늘 가장 많이 취해 있었다. 그러고는 다짜고짜로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복희야 너 알지" "너는 알지, 너는 알잖여? 올래! 몰른단 말여?"

갑자기 건네는 말에 처음에는 무슨 일을 안단 말인가 생각하다가도 따뜻하게 손을 쥐는 그 순간 나는 아무 말 못했다. 먼 허공을 향해 기약없이 달려가던 시선을 거두어 내 눈을 바로 보는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네 알아요" 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러면 "그려, 술 한잔만 혀" 하며 따라주는 그런 술에 두 잔이면 쥐약이요 석 잔이면 사약인 나의 주량은 여지없이 묵살되곤 했다. 그래 그랬다.

김선생이 쥐어주는 손은 고향 같았다. 아니 그는 너무나 따스한 오라비였다. 그때쯤이면 나도 모르게 내가 슬퍼졌고 또한 김선생의 대책 없는 순결성이나 개인사가 지닌 비극적 삶이 자꾸 마음으로 밀려와 서러웠다.

불과 네 살 때 6. 25로 아버지와 큰 삼촌이 우익에게, 면장을 지내던 외삼촌이 좌익에게 학살당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때가 6월 어름이리라고 짐작은 하지만 어느 날인지 알 수 없어 생신날에 제사를 모시는 비극적 삶이 고스란히 얹혀 왔다.

이후 할아버지의 무릎 밑에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초등학교 들어가기도 전에 백수문이라 일컫는 천자문은 물론 통감.명심보감.소학.대학을 거쳐 맹자까지 배웠던 가난한 천재의 삶과 출가 환속으로 이어지는 극단의 외줄타기가 어렴풋이 느껴지기도 했다.

또 '만다라' 이후 이런 저런 실패에 가까운 소설가의 삶이 내겐 아릿한 슬픔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김선생은 대개 김사인.임우기.이은봉.이재무.김영현.이영진. 강형철 씨 등 젊은 문인들과 함께 오거나 이시영.송기원.정희성.안종관 씨 등의 비슷한 연배의 문인들과 함께 왔다.

또한 신경림.고은.송기숙.염무웅.김윤수씨 등 선배문인들과 오곤 했는데 가끔은 원경스님이나 나병식 풀빛출판사 사장 혹은 민예총에서 일을 보는 김용태 사무총장 등과 함께 왔다.

특히 풀빛출판사 나사장이나 김용태씨와 함께 올 때는 바둑으로 거의 밤을 세웠다. 만원이나 2만원 정도가 오가는 판이었는데 술값은 아까워하지 않았지만 바둑을 두고서 잃는 돈에는 매우 엄격했다.

'문단의 국수' 였으니 양보가 있을수 없다. 그러다가 밤을 새운 날은 아침에 북어국을 끓여서 같이 먹곤 했는데 입맛이 까다로와 일반 음식점에서는 식사를 거의 하지 않았다. 일테면 집에서 먹는 밥이거나 그에 방불한 그 무엇이 아니면 전혀 식사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김선생은 술을 마셔도 표정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 분명 많이 취했는데도 다른 사람이 보면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처음 보는 사람이거나 본인이 인정하지 않는 작가나 시인에게는 매우 냉정했다.

갑자기 "그래 무슨 소설을 썼는고" 라거나 "시를 증말로 쓰긴 썼어" 라고 물으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매우 당황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할 때 그 표정이나 어조가 거의 흐트러짐이 없었으니 처음 보는 사람들은 오해를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다가 술을 마셔도 오랜 산문(山門)의 생활에서 익힌 데로 가부좌를 틀고 술을 마셨으니 다른 사람이 오해를 할밖에. 그러나 그즈음이면 김선생은 이미 실신상태나 다름 없다.

한복희<전 탑골주점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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