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세상] 첫번째 이야기 - 실새삼과 고마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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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대부분 위로 향하는 속성이 있다. 스스로 양분을 만들자면 햇빛이 필요하기 때문에 가지를 곧게 뻗어 올리고 잎을 펼친다.

그렇더라도 해를 찌를 듯 높이 뻗어 올라간 나무 옆에 서면 줄곧 1등만 하던 녀석이나 재벌이 되어 떵떵거리는 동창 회장 같아서 지레 움츠러든다. 그래서 산책길에 든 내 시선은 으레 아래로 향한다.

그날도 내 눈길은 발끝 언저리에 있었다. 그러다가 길옆에서 재잘거리는 도랑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무더기로 꽃을 피워 낸 고마리, 스스로는 설 수 없어 둑을 타고 오른 할미밀망 넝쿨 등 고만고만한 풀들이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주위에 잘 가꾸어진 키 큰 정원수들이 위용을 뽐내고 있었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쪽에선 온전치 못한 몸으로 태어난 민이의 두 팔처럼 허공을 휘젓는 실새삼이 반투명한 가지를 고마리 위에 늘어뜨렸다.

다른 것은 다 푸른데 실새삼은 말간 젖빛이었다. 광합성을 해야 하는 식물이 잎파랑이가 없다는 것은 사람으로 친다면 장애인인 셈이다. 생태계의 맨 아래 생산자로서는 생존조차 보장될 수 없는 조건이다. 어렸을 적 어머니는 콩 농사를 망치는 몹쓸 풀이라고 눈에 띄는 대로 걷어냈다. 그렇게 천대받으면서도 해맑은 꽃을 피워냈다.

실새삼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애틋한 정이 간다. 씨앗이 발아하면 두 개의 떡잎을 낸다. 다음에는 본 잎을 내어 스스로 양분을 만들어 자라는 것이 순서이겠지만 실새삼은 줄기만 뻗어 간다. 스스로 양분을 만들 수 없는 몸이기 때문에 건강한 숙주를 찾아나서는 것이다. 약자를 공격해서 가진 것을 빼앗는 게 생태계의 상례지만 실새삼만은 다르다. 의지할만한 건강한 숙주를 찾으면 그곳에 관을 대고 뿌리를 스스로 자란다. 어차피 광합성작용을 못 할 바에야 뿌리에서 물을 빨아올린들 무엇에 쓰겠는가. 잎 또한 키우지 않는다. 기생하는 처지에 군식구까지 거느릴 수 없어 작은 비늘 같은 잎사귀 흔적만 남기고는 이내 거둬버린다. 객쩍은 증산작용을 억제해서 숙주에게 피해를 줄이자는 계산일 것이다.

실새삼의 공존공생 철학으로 숙주는 건강하게 자란다. 숙주 또한 실새삼의 철학을 깨우쳐 나눔과 베풂을 철학을 실천하는 것이다. 튀밥 같은 꽃을 소담하게 피워낸 고마리를 어찌 피해식물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실새삼과 고마리가 한몸으로 서서 각기 다른 꽃을 피워낸 것을 보면 나누면 배가 된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불안전한 비극적 존재로서의 운명인 실새삼이 겸손하게 의탁하는 생태구조는 우리에게 삶의 양식을 보여 주는 것만 같다.

김용순 (천안수필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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