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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기 왕위전 도전기 5국' 한신과 항우의 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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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제38기 왕위전 도전기 5국
[제6보 (85~97)]
黑.이세돌 9단 白.이창호 9단

이창호9단에게서 백△와 같은 '낮은 포복'은 흔한 일이다. 그는 별 거부감 없이 사선과 패망선으로 불리는 저 밑바닥을 기어넘곤 한다. 원칙론자들에게 바닥을 기는 일은 굴욕 그 자체며 목불인견의 참상으로 각인돼 있다. 프로 중에도 이런 사람은 많다. 제자가 그런 수를 둔다면 당장 "가망 없는 바둑"이라고 불같이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이창호가 지닌 사고의 유연성은 참 놀랍다. 그 역시 어린 시절에 1선은 사선이고 2선은 패망선이란 교육을 수없이 받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상상력을 옥죄는 고정관념으로 자리잡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세돌9단이 89로 요소를 이었을 때 이창호가 다시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지금 죽어 있던 귀의 흑이 사는 수가 발생했다. '참고도'백1로 두면 귀는 잡는다. 간단한 얘기인데 이창호는 무얼 걱정하는 것일까. 이창호는 흑2로 한방 찔리는 것이 두렵다. A의 뒷맛도 껄끄럽고, 그럴 일은 없겠지만 B로 끊겨 수없는 매듭을 이어야 하는 비극이 발생한다면 바둑은 지고 만다.

이창호는 결국 92로 잇고 93의 삶을 허용했다. 필사적으로 덤벼오는 상대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듯한 한 수였다. 흑은 좌상도 살리고 좌하도 살렸다. 과연 이세돌은 천하장사다.

우변 흑진을 고려한다면 백집은 의외로 적어보인다. 혹 역전이 아닐까. 백이 너무 몸조심했던 것은 아닐까. 이런 풍설 속에서 이창호는 상변과 좌변 흑에 대한 긴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바짓가랑이를 기던 한신과 산을 뽑는 힘을 지닌 항우의 마지막 싸움이 다가오고 있었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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