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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세대 유머 썰렁해야 제맛?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웃음이 중요한 세상이 됐다.

결혼조건에서도 사교자리에서도 유머가 풍부한 사람이 환영받는다. 고민도 많고 걱정도 많은 생활 속에 '웃음을 자아내는 능력' 이 중요해진 것이다. 그래서 생활 속의 유머는 끊이지 않는다.

연예인 최불암을 빗댄 풍자가 한동안 인기를 끌더니 귀가 멀어 말 뜻을 잘못 알아듣는 사오정이 등장해 우리들을 즐겁게 했다.

요즘은 또 다른 유머들의 전성시대다.

내 꿈꿔 시리즈.삼행시 시리즈.핸드폰 시리즈는 신세대들이 즐기는 유머계의 삼두마차.

"자…알, 자라, 니 꿈은 내가 꾼다."

(폼 잡는 최민수) "달다, 내 끈꺼. "

(혀 짧은 최지우) "내 꿈을 꾸시오~,"

( '왕과비' 의 인수대비 채시라) 주~~상~~.

(멍청한 사오정) "잘자, 개 꿈꿔."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 의 유오성)"난 한 새끼 꿈만 꿔!"

한 광고 문구를 빗댄 이 유머를 모른다면 이미 낡은 세대다.

잘 자 시리즈와 각축을 벌이고 있는 것이 '썰렁' 삼행시 시리즈. 말이 삼행시이지 기존 삼행시와 달리 문맥의 연관성이나 논리 전개를 무시하는 것이어서 듣는 이를 황당하게 만드는 썰렁한 유머다.

'30대 후반만 돼도 '저게 무슨 말인가' 싶을 정도로 엉뚱하다. 등장 주제도 올빼미.해파리.말미잘 등 하등생물이 대부분이다.

해:해파리야,

파:파리가 널 사랑한대,

리:리얼리(정말)?. ( '해파리' )

올:올빼미야,

빼:빼-빼빼빼빼 빼-빼빼빼빼(테크노 리듬으로),

미:미안해. ( '올빼미' )

휴대폰 문자 메시지 시리즈는 한술 더 뜬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고 있는 이 시리즈는 휴대폰 사용의 새 풍속도다.

"야 나랑 콩 까자. .(쉼표를 많이 찍어 한 화면을 넘긴 다음). .두부 해먹게. " "나 너에게 묻고 싶은 거 있는데. ........삽줘. " 이런 식이다.

야하다 싶은 이야기도 등장한다. "보고싶다 니 펜티. .....엄 컴퓨터를. "

세대가 다른 이는 곁눈질로 핸드폰에 찍힌 문자를 힐끗 쳐다봤다 하더라도 웃음이 나오기 어려울 정도다.

올해 대학을 졸업한 이지석(24.서울 종로구 부암동)씨는 "허무해도 재미있잖아요. 못알아들어도 그만이죠" 라고 말한다.

그러나 30대만 넘어도 이런 유머에 대한 반응이 달라진다. 노총각 최모(38)씨는 얼마전 20대 후반의 여성과 선을 봤다. 서먹서먹한 분위기에서 상대방이 꺼낸 얘기가 삼행시 시리즈. "혹시 삼행시 시리즈 중에 사오정 얘기 아세요. " "아뇨, 해 주실래요. " "운을 띄우세요." "사:뭐라고□, 오:뭐□, 정:안들려. .뭐라는 거야!" 그러나 아무 표정이 없는 최씨. 여자가 용기를 내 한 이야기건만 그의 반응은 그야말로 썰렁했다.

"왜, 머릿글대로 안하고 '뭐라고' 만 하는 거예요?"

사오정 얘기라 자신있게 알아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최씨지만 이미 순간을 놓쳐버린 것. 뒤늦게 의미를 깨달았지만 사태를 수습할 수는 없었다.

"세대차이란 종이 한장 차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너무 젊은 여성을 만났나 봐요. " 최씨의 변(辯)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유머의 본산지는 젊은 취향의 방송프로그램이기 때문. 이런 프로그램과 거리가 먼 기성세대들로서는 자연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 더구나 기성세대는 '웃기는 이야기' 에 길들여 있지만 신세대는 전혀 우습지 않은 썰렁함 속에서 웃음을 발산하는 것이 특성이다.

그래서 기성세대는 유머에 모두 따라 웃지만 신세대는 웃어도 그만, 안웃어도 그만이다.

문화평론가 이성욱씨는 "서로 만나 대화하는 것이 전통적인 소통수단이지만 컴퓨터.휴대폰의 일상화는 이 대면문화를 간접적인 것으로 변화시킨다.

문자메시지 시리즈는 대표적인 경우다. 앞으로 새로운 소통 문법들이 속속 나오면서 기성세대의 소외는 골이 깊어질 것" 이라고 내다봤다.

"63빌딩 꼭대기에서 탁구를 하다 공이 밑으로 떨어지자 내려가서 주워온 후 '1:0' 이라고 했다" 는 최불암 시리즈에는 기성세대의 완고함과 우직함을 풍자하는 메시지가 담겼다. 그 근간은 사회의 고정관념에 대한 공격이었다.

최불암 시리즈를 밀어내고 1998년부터 유머 세상을 평정한 사오정 시리즈는 '썰렁함' 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여기엔 냉소와 불신, '왕따' 현상의 풍자가 담겨 있었다.

환경미화원인 아버지가 그를 도우러 나온 사오정에게 "이제 나오지마" 라고 말했다.

그러자 "헉헉" 거리는 사오정. 가엾게 여긴 아버지가 박카스를 내밀며 "힘들지?" 라고 하자, 사오정은 뒤로 벌렁 누우며 이렇게 말했다.

"한 게임 더 해?" 이처럼 90년대 후반 유행했던 유머만 하더라도 표적이 있었다.

최불암과 사오정을 등장시켜 권위주의적 기성 세대와 세상을 비웃기도 했듯이. '하지만 최근 유머는 개인 단위로 변화하면서 주변이 소재거리가 됐다. 그래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상대방의 반응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기존의 유머가 사회와 연관된 영역에 대한 관심의 공유였다면 유머의 생산자들이 분화하면서 기호를 통한 놀이, 혹은 말장난처럼 돼가고 있는 것이다.

한신대 김종엽 교수(사회학)는 "조크란 누군가를 비꼬려는 공격성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데 최근의 유머는 이런 요소가 약해 웃고 나도 쾌감이 덜하다" 고 평했다.

신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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