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벤처정신 망치는 정부지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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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정부의 지원은 벤처정신을 망가뜨린다.

신문 보도에 의하면 정통부의 어느 국장은 벤처에 대한 정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모든 기업이 골고루 혜택을 받는 방식을 지양하고… 전문가의 종합적인 평가를 토대로 지원기업을 선별해 집중 지원하겠다. "

또 며칠 전에는 국세청의 어느 간부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기술개발에 재투자하거나 사회복지기금으로 환원하는 벤처기업과 기업가에게 중대한 과실이 없으면 세무조사를 면제할 방침이다. "

둘 다 오보(誤報)이기를 바란다. 오보가 아니라면 경제위기 이후에도 경제부처 공무원들의 사고가 별로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1997~98년의 경제위기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위기 자체가 관치금융 때문에 야기됐음에도 불구하고 위기해소 과정에서 정부의 시장개입이 오히려 더 심화됐다는 데 있다.

금융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은 더 강화됐고, 다수의 금융기관이 국유화 됐으며, 대기업과 중소기업에 대한 정부의 간섭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벤처경제' 란 정부의 지원이나 간섭없이 아이디어와 자본, 그리고 인력이 자유롭게 결합하는 데서 창의력이 발휘되고 혁신이 이뤄지는 새로운 질서를 의미한다. 미국 정부가 지원해 실리콘 밸리가 세계의 벤처 중심이 된 것이 아니다.

대만 중소기업의 경쟁력이 세계적인 이유는 바로 대만 정부가 기업을 가만히 놓아두었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이유가 있지만 대만 정부는 기업과 유착하지 않고 거리를 두는 정책을 견지해 왔고, 따라서 기업들은 살아남기 위해 부채도 많이 짊어지지 않고 자생력을 길러온 것이다.

우리 정부는 과거 중소기업이나 농가를 지원한답시고 돈을 갖다 퍼부어대니까 이들 지원 대상자는 시간이 갈수록 자생력을 잃어 왔다.

벤처와 창업의 열풍은 우리 경제가 처음으로 정부의 간섭에서 벗어나 정말로 시장기능에 의해 움직이게 되는 절호의 기회다. '벤처정신' 이란 개인과 기업이 자력으로 혁신해 신시장과 신상품을 개척하겠다는 새로운 가치관이고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경제위기 직후에는 높은 실업률 때문에, 그리고 일부 대기업의 몰락을 메워줄 대안으로서 정부가 창업과 벤처를 촉진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필요했는지 모르나, 이제는 벤처기업에 대한 직접 지원책은 없어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자부.정통부.과학기술원.중기청.지방자치단체까지 서로 경쟁적으로 벤처를 지원하겠다고 나서고 있고, 급기야 국세청까지 거들고 있다.

벌써 인터넷과 벤처가 과열됐고, 코스닥 주가에도 상당한 거품이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이 문제는 누구도 판단하기 어려우나, 적어도 정부로서는 중립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세금을 거둬들여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자의적으로 세무조사를 면제시켜 주겠다고 해서는 안된다.

벤처기업이 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이익의 일부를 사회에 내놓겠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세금을 거둬야 할 국세청은 기업의 기부행위를 조장하는 위치에 있지 않다. 꼭 국세청이 그런 일을 해야 한다면 특정 유형의 기업에 특혜를 주는 방식이 아니고, 모든 기업에 똑같이 적용되는 기준이어야 한다.

이제는 정부가 특정산업이나 기업을 육성하는 산업정책은 없어져야 한다.

벤처에 대한 정책도 인프라 확충, 법과 제도 정비, 그리고 교육과 인력양성 등으로 국한돼야 한다. 그리고 정부의 정책이나 과세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기존 기업과 벤처기업, 전통산업과 정보통신산업에 대해 중립적이어야 한다.

기업을 가만히 놓아두는 것이 최선의 산업정책이다. 정부의 벤처기업에 대한 직접지원은 벤처정신의 근본을 망가뜨리는 짓이다.

정구현<연세대 경영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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