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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우 기자의 까칠한 무대<17> 최승희와 친일

중앙일보

입력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신문 기자였던 오빠 손에 이끌려 우연히 찾아간 극장이었다. 열 다섯 여고생의 마음은 순간, 콩닥거렸다. 생전 처음 본 몸짓은 날렵하면서도 오묘했고, 정적이면서도 폭발적이었다. 본래 성악가를 꿈꾸던 소녀는 그 한 편의 공연이 험난한 운명의 시작이 될 거라곤 전혀 짐작조차 못했다. 막이 내린 뒤 그는 무작정 분장실로 달려갔다. 그러곤 애원했다. “일본으로 건너가겠습니다. 저를 받아주십시오.”

20세기 한국이 낳은 세계적 무용가 최승희와 그의 일본인 스승 이시이 바쿠의 첫 대면은 이토록 극적이었다. 그해 곧바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최승희는 서양의 모던 댄스를 배웠고, 이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왕성하게 활동했다. 1m70㎝의 늘씬한 키, 뚜렷한 이목구비와 도도한 자태, 관능적인 움직임 등에 매료된 관객들이 그의 공연 티켓을 사기 위해 극장 주변을 세 바퀴, 네 바퀴씩 돌며 장사진을 치는 진풍경을 연출하곤 했다.

그는 또한 최초의 ‘한류 스타’였다. 아시아는 물론, 미국·유럽·중남미에서도 150번 넘는 순회 공연을 했고, 1939년엔 아메리칸 발레 카라반(현 뉴욕 시티 발레단)과 함께 공연을 했다. 세계가 인정한 대무용가에게 늘 따라붙는 수식어는 ‘코리안 댄서’였다. 기생들만 하는 것으로 치부되던 춤을 예술로 승화시켰고, 서양의 무용을 한국의 전통과 접목시키고 이를 다시 해외에 알리는 등 그가 한국 예술에 끼친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새삼스레 최승희를 거론하는 건 최근 불거진 ‘친일’ 논란 때문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엔 최승희의 이름도 빠지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위대한 예술가라도 용서받지 못할 친일 행위를 했다면 분명 비난받을 수 있다. 문제는 그 내용이다. 최승희의 친일 행위는 크게 두 가지로 알려지고 있다. 일본 군인들을 찾아가 위문 공연을 했다는 점과 일곱 차례에 걸쳐 국방 헌금을 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 시절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최고 스타로 추앙받는 그를 일본 정부가 가만둘 리 만무했을 터다. 그 요청을 최승희가 감히 뿌리칠 수 있었을까. 1910년 경술국치 이후(1911년생)에 태어나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던 그가 현재와 같이 한국과 일본을 뚜렷이 구분했을까.

광복 이후 최승희는 북한으로 넘어간다. 그의 남편 안막이 사회주의자였으며, 북의 선전선동을 위해 최승희가 필요했다는 점 말고도, 해방 이후 그에게 쏟아진 후배 무용가들의 ‘친일파’ 공격이 월북의 또 다른 동기였다. 김일성의 총애 속에 자신의 예술혼을 꽃피우던 최승희는 그러나 67년 숙청된다. ‘부르주아적 행태를 보인다’는 이유 이외에 숙청의 또 다른 빌미 역시 ‘친일’이었다. 남과 북 어디에서건 반대파들은 필요할 때면 ‘친일’을 내세워 최승희를 몰아내려 했다. 훗날 김일성은 그의 회고록에서 “일본 제국주의 지배 체제하에서 민족의 정신을 드높였다”며 최승희에 대해 재평가를 하니, 이는 또 무슨 얄궂음일까.

최승희의 일대기를 소설 『나는 춤이다』로 써낸 김선우는 작가 후기에 이렇게 적었다. “최승희의 존재를 받아내기에 우리의 근현대가 너무도 불우하게 기우뚱거렸다.” 올해는 최승희가 죽은 지 정확히 40년이 되는 해다. 오랫동안 최승희에게 ‘빨갱이’란 꼬리표를 붙였던 남쪽의 후예들은 이제 해묵은 ‘친일’이라는 도장을 새삼스레 꺼내 들어 그의 무덤에 찍어내려 하고 있다.


중앙일보 문화부 공연 담당 기자. 타고난 까칠한 성격만큼 기자를 천직으로 알고 있다. 올해로 3회째를 맞은 ‘더 뮤지컬 어워즈’를 총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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