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경영은 예술과 같아 … 모방만 해선 명작 못 내놔”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41호 24면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맞은편에 있는 일신방직 본사는 이름을 ‘일신 갤러리’라고 바꿔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건물 입구에 있는 이탈리아 조각가 마우로 스타치올리의 거대한 추상 조형물 ‘일신 여의도 ’91’이 손님을 맞는 것부터 예사롭지 않다. 발걸음을 건물 내부로 옮기면 촘촘하게 미술품을 뿌려놓은 복도 전시장을 만나게 된다. 실 뽑는 방적 회사의 본사가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지난 17일 만난 이 회사 김영호(65) 회장은 “모든 작품을 직접 골랐다”면서도 ‘보유 작품이 얼마나 되느냐’는 질문엔 “일일이 헤아려 보지 않아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여의도의 명물 ‘일신 갤러리’
-모두 직접 고른 작품인가.
“그렇다. 국내는 물론이고 외국 작품도 반드시 눈으로 확인하고 구입한다. 전시회나 경매장도 찾아 다니고 카탈로그도 챙겨 본다. 그래야 가슴에 와닿는 작품을 고를 수 있다.”

CEO가 꼽은 CEO, 위기 경영의 지혜를 듣는다 <16> 김영호 일신방직 회장

-컬렉션을 시작한 지 얼마나 됐나.
“1974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면서부터다. 처음엔 서울대나 홍익대 등 미술대학 졸업 전시회를 찾아 다녔다. 마음에 닿는 작품이 있으면 학생들 셋방살이하는 곳을 찾아가 둘둘 말린 그림을 사기도 했다.”
김 회장이 대학가 자취방에서 골라낸 옥(玉) 가운데 한 명이 팝 아티스트 고영훈이다. 김 회장이 75년 구입한 ‘코카콜라’는 현재 한국 팝 아트의 효시 격으로 불린다(이 작품은 24일까지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특별 전시된다). 그의 심미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영호 일신방직 회장은 1970년대 중반부터 그림 수집을 해온 예술 애호가로 유명하다. 김 회장이 건축 디자이너 게릿 리에트벨트의 ‘레드 앤 블루’ 의자에 앉아 포즈를 취했다. 위 사진은 미국의 신표현주의 작가 데이비드 살레의 작품을 설명하고 있는 모습.

-요즘은 어떤가.
“예전만큼 자주 갤러리를 찾지 못하지만 관심 있는 작가들의 전시회가 있으면 시간을 내려고 애쓴다. 외국 작품 구입은 뜸하다. 수년 전부터 해외에서는 작품을 사지 않고 있다. 원화 가치가 떨어져 아무래도 (작품 구입하기가) 조심스럽다.”
환율 움직임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게 기업인이다. 예술품을 구매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김 회장은 “천천히 그림 얘기나 하자”고 했지만 역시나 비즈니스맨다운 대답을 내놓았다.

일신방직은 김 회장의 부친인 고(故) 김형남 회장이 세운 국내 1위 면방적 회사다. 일제가 36년 세운 전남방직이 모체다. 고 김 회장은 고 김용주 대한해운공사 사장, 고 이한원 동아상사 사장 등과 손잡고 51년 이 회사를 인수했다. 이후 이한원 사장이 지분을 정리했고, 61년 일신방직과 전남방직으로 분리됐다. 김 회장이 전하는 분리 과정이 흥미롭다.

“처음엔 담을 쌓고 각자 활동을 했다. 그러다 일신은 대로변 쪽 회사 정문 터를 보유하는 대신 회사 이름(전남방직)을 양보하기로 합의했다. 이때 선친께서 회사 이름을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는 뜻의 일신(日新)으로 정했다. 목화씨를 한반도에 들여와 이 땅에 면 산업이 있게 한 문익점 선생의 자(字)도 일신이다.”

-면방은 한국 산업 근대화의 주역이었지만 지금은 사양산업인데.
“(웃으면서) 그런 얘기를 80년대 초반부터 들었다. 그러면 한국에 있는 방적 회사는 모두 문을 닫아야 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양산업이란 얘기가 거론된 지 10년쯤 지난 80년대 말부터 2~3년간 면방업계는 최고 호황을 누렸다. 지금도 괜찮다. 현재 국내엔 114만 추의 설비가 남아 있다. 최전성기(370만 추) 때보다는 줄었지만 아직은 경쟁력이 있다. 그중 일신이 19만 추를 보유하고 있다.”

-일신은 업계에서 최고의 품질과 생산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는다.
“자동화 시스템을 갖추고 꾸준히 비용 절감을 꾀했다. 가장 많은 물량이 세계 최대 의류·봉제 생산국인 중국으로 수출된다. 미국이나 유럽의 까다로운 고객이 중국 업체에 (우리 회사 제품처럼) 품질 좋은 실을 사용해 줄 것을 요구해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발효되면 도움이 될까.
“미국 수출은 당연히 늘어날 것이다. 중국이나 동남아 시장에 대한 기대도 크다. 지난 10년 새 중국의 1인당 의류 소비량은 2.5배 늘었다.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서 섬유 산업도 성장했다. 인도·인도네시아·베트남 등 인구가 많으면서 잠재력 있는 시장도 계속 성장하고 있다. 섬유 시장도 나름 블루오션이다.”

김 회장이 회사 경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것은 75년 일신방직의 자회사인 ㈜신동이라는 봉제회사 대표를 맡으면서다. 당시 신동은 적자를 면치 못해 월급날이면 일신방직에 손을 벌리곤 했다. 고 김 회장이 매각하려는데 김 회장이 나섰다고 한다.

“내가 맡아보겠다고 손을 들었다. 봉제의 ‘봉’자도, 경영의 ‘경’자도 모르던 때였다. 다만 다른 봉제회사는 다 잘되는데 우리만 안 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알고 보니 사람 문제였다. 당시 봉제산업의 경쟁력은 주문 물량을 제때 소화하는 데 있었다. 숙련공이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그런데 경험 많은 직원들을 경쟁사에 빼앗기기 일쑤였다. 월급도 올려주고 공장에 내려가 고기도 사주면서 직원들을 붙잡았다.

정말 열심히 일했다. 어떨 땐 퇴근시간이 밤 11시30~40분이었는데 통행금지만 없었다면 더 오래 일했을 것이다. 1년 뒤 회사는 흑자로 돌아섰다.”

이후 김 회장은 친형인 김창호 회장의 바통을 이어받아 82년 일신방직 대표이사에 취임한다. 그러나 또 다른 위기가 김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83년 12월 광주 방적 2공장에서 누전으로 화재가 난 것이다. 공장 건물과 정방기·합연사기 등 설비가 모두 소실돼 수백억원대 손실을 봤다.

-어떻게 극복했나.
“공장 재건을 위해 백방으로 뛰면서 일본·이탈리아·서독 등 선진국 시설을 견학할 수 있었다. 이후 유럽에서 고속생산 설비를 들여왔다. 재가동 2년 만에 투자 자금을 모두 회수했다. 업계에선 통상 투자 7~8년 내 자금을 회수하면 괜찮다고 본다. 그런데 2년 만에 해냈으니 기대 이상이었다. 자금 여유가 생겨 청원공장도 지을 수 있었다.”

일신은 이후에도 광주 직포공장(90년), 충북 청원공장(2005년)이 화재로 소실되는 불운을 겪었지만 잘 극복했다. 김 회장에게 가장 어려웠던 때는 언제였을까.

“오일쇼크 이후가 힘들었다. 원면 가격이 파운드당 1달러까지 올랐다. 반면 완제품 실 값이 80~90센트였으니 공장을 안 돌리는 게 더 나을 정도였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원면 가격은 파운드당 70센트 정도다. 면방은 원가 중 원료 비중이 60%에 달한다. 그러나 우리는 거래회사와 신용을 지키기 위해 비싼 값에 원면을 구입했다.”

김 회장은 ‘면방 한 길’을 걸었지만 신사업 개척도 놓치지 않았다. 일신은 현재 패션 벤처기업 지오다노를 비롯해 창투사인 일신창업투자, 와인 수입을 주로 하는 신동와인, 천연 화장품 ‘바디숍’을 유통하는 BSK코퍼레이션 등 7개 계열사를 두고 있다. 지난해 말 계열사의 총자산은 5300억원이었다.

-일신창업투자는 영화 투자를 적극적으로 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조카인 고정석 사장이 대표이사로 있다. 고 사장은 미국 MIT 슬론스쿨(경영대학원)을 나와 투자회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내가 ‘직접 회사를 차려 보라’고 불렀다. 일신창투가 90년대 초반 영화 ‘은행나무 침대’에 투자한 적이 있다. 나도 시사회를 가봤는데 ‘이게 장사가 되겠나’ 싶더라. 그런데 대박이 났다. 이때 ‘나는 고객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해 영화 투자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패션 브랜드 ‘지오다노’가 젊은이들에게 최고 인기를 누렸는데.
“90년대 론칭 초창기에는 매년 30%씩 성장했다. 지금은 ‘자이언트급 브랜드’가 들어오면서 경쟁이 치열하다.”

-요즘 주가가 5만9000원대, 시가 총액은 1400억원대로 연초에 비해 그다지 변화가 없다. 증권가에서는 ‘안전하지만 재미없는 주식’이라고 한다.
“인기 없는 주식이라는 사실은 인정한다. 특별한 움직임이 없어서 그렇다. 그러나 장기 투자자라면 관심을 가질 만하다. 장부 가격만 따져도 자산이 시가총액의 세 배가 넘는다.”

-와인 매니어로 유명하다. 와인 수입회사인 신동와인까지 세웠는데.
“신동와인은 처음부터 비즈니스를 하려고 세운 회사는 아니다. 미국 유학 시절 99센트짜리 와인을 즐겨 마셨는데 이게 와인을 즐겨 찾는 계기가 됐다. 한국에 돌아와 보니 마시고 싶은 와인을 구하기 어렵더라. 한번은 영국 소더비 경매에서 와인 카탈로그를 보내왔다. 욕심이 생겨 보르도 1등급 와인을 몇 상자 구입했다. 알다시피 개인별 와인 구입 한도는 2병이다. 그 와인 맛을 보기 위해 관세는 물론 와인 값보다 많은 벌금을 물어야 했다. 이때 ‘와인 수입면허가 있다면 관세만 물면 되는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결국 어렵게 수입면허를 받았다. 나중에 산지별로 품질이 우수하다는 ‘로마네 콩티’ ‘기갈’ ‘안젤로 가야’ 등 유명 브랜드와 독점 계약을 맺었다. 와인 사업은 10년 넘게 적자를 내다 2002년부터 돈을 벌고 있다. 적자가 나면 문을 닫거나 다른 수를 찾아야 하는데 와인에 대한 애착 때문에 계속 유지했다. 그러다가 와인 붐이 불면서 이익을 내고 있다.”

-와인의 어떤 점이 매력적인가.
“위스키와 버번은 브랜드에 따라 똑같은 맛이다. 블랙이나 블루 등 레벨에 따라 맛이 모두 같다. 와인은 같은 품종이라도 산지 마다, 빈티지(생산연도)마다 맛이 독특하다. 항상 새로운 기대감을 갖게 한다. 또 음식의 훌륭한 동반자이기도 하다. 그 다양하고 오묘한 맛을 두루 경험하고 싶다.”

“인기 없는 주식이지만 길게 보면 괜찮아”
다시 화제를 그림으로 돌렸다. “아주 어려서부터 그림에 관심이 있었다. 학년을 마치고 나서도 중·고교 미술 교과서는 반드시 보관했다. 또 세잔은 세잔대로, 마티스는 마티스대로 묶어서 스크랩북을 만들기도 했다. 당시는 미술 서적을 따로 구할 수 없던 때라 아주 소중한 공부가 됐다.”

-문화예술 후원에도 원칙이 있나.
“현역에서 활동하는 예술가에게 힘이 되려고 한다. 지금 이중섭 작품을 산다고 하자. 이는 작품 소장가나 갤러리에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작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반 고흐는 평생 자기 작품을 단 한 점밖에 팔지 못했다고 한다. 당대에는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그나마 동생이 캔버스와 물감을 후원해준 덕분에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지금이야 그의 작품이 수천만~수억 달러에 팔리고 있지만 불우했던 고흐의 일생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브람스나 모차르트를 듣는 것도 좋지만 난해한 현대 음악에도 투자해야 한다. 그래야 또 다른 브람스, 또 다른 모차르트가 탄생할 수 있다. 과거의 훌륭한 작품도 좋지만 앞으로 또 다른 훌륭한 작품이 나오려면 현역 미술가·작곡가들이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후원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가급적 당대의 작가를 지원한다. 내가 찾지 못하면 권위 있는 콩쿠르에서 수상하거나 전문가에게 인정받은 유망한 작가를 유심히 살펴본다.”

-이런 메세나 활동이 기업 경영에 어떤 도움을 주나.
“고정관념을 갖지 않고 유연한 사고를 하도록 돕는다. 예술은 기본적으로 창조 작업이다. 과거를 모방해서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다. 기업을 경영하면서 나는 가급적 아랫사람을 간섭하지 않으려고 한다. 일신의 경영은 젊은 창작가들에게 상당히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다음 인터뷰할 분을 소개해 달라.
“동일방직의 서민석 회장을 추천한다. 일신이 광주에 기반을 둔 방적 회사라면 동일은 인천에서 태동했다. 면방 업계는 경쟁도 하면서 협조도 잘하는 편인데 선배인 서 회장에게 배우는 것이 많다. 패션, 제조업 등 사업도 알차게 진행하지만 메세나 활동도 적극적이다.”



●다음은 서민석 동일방직 회장입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