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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경의 책vs책] 남성적인 검열의 틀 깨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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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김혜순 지음
문학동네, 264쪽, 1만원

메두사의 웃음/출구
Le Rire de La M럅use /Sorties
엘렌 식수 지음, 박혜영 옮김
동문선, 223쪽, 1만9000원

연전에 어떤 자리에서 한 동년배 지식인 남성을 만난 일이 있다. 그는 내게 소설을 잘 읽었다는 인사를 건넨 후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데 선생님의 언어에는 여성 작가로서의 한계가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남성 작가들의 작품을 열심히 읽고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정리해 본 다음….” 그런 말을 들을 때 나는 웃음 띤 얼굴로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내면에서는 이런 생각이 솟아오른다. “이 사람은 여성에게는 고유한 육체와 언어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걸까? 혹시 남성적인 것은 정당하고 우월한 것, 여성적인 것은 그릇되고 열등한 것이라는 이분법을 가지고 있는 걸까? 설마 우리나라 지식인 남성의 평균 수준이 이 정도인 것은 아니겠지?”

외국 어느 나라에서 ‘여성 언어 사전’이 나왔다는 뉴스를 보았다. “구두 사는 데 함께 가줄래?”라는 말은 “구두 좀 사줘”라는 뜻이라는 예문도 들었다. ‘여성 언어 사전’은 틀림없이 ‘약자의 생존법 사전’일 것이다. 만약 내가 “네, 알겠습니다”라는 언어의 내면에 있는 생각을 죄다 발설했다면 그 순간 나는 골치 아픈 여자, 잘난 척하는 여자, 사회성 없는 여자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사회적 약자의 방식이 아니다.

“왜 여성의 언어는 주술의 언어인가, 왜 여성의 상상력은 부재·죽음의 공간으로 탈주하는 궤적을 그리는가, 왜 여성의 시적 자아는 그렇게도 병적이라는 진단을 받는가, 왜 여성의 언술은 흘러가는 물처럼 그토록 체계적이지 못한가….”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의 서문에서 위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공감으로 가슴이 뻐근하게 아팠다. 오래도록 여성에게는 언어가 없었다. 여성의 육체에 대한 억압은 언어의 억압, 감정의 억압, 의식의 억압으로 이어지고, 그렇게 억압된 것들은 몸의 병으로 표출되었다. 여성에게 허용된 유일한 언어는 남성을 향한 헌신과 사랑의 언어뿐이었다. 이 책에는 ‘연인, 환자, 시인, 그리고 너’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저자는 여성,글쓰기,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모든 모색을 이 책에 담았다. 영감·공간·어머니·징후·소용돌이 등 19가지 소재를 채택해서 여성적 글쓰기의 본보기를 제시한다. 문체는 소용돌이치고, 유희하고, 주술성을 띠고, 부풀어오른다. 하지만 폭발하지는 않는다. 마지막으로 여성 시인으로서 세상을 읽는 고유한 척도로 프랙탈과 만다라를 채택한다. 안과 밖을 함께 아우르는 만다라의 구조, 세상 속에 몸을 담그고 세상을 읽는 프랙탈 도형 같은 독법을 갖기를 꿈꾼다. 그리하여 시가 “스스로 사유하는 하나의 형상체가 되도록 한다.”

프랑스 페미니스트 엘렌 식수는 ‘가장 유혹적이고 도전적인 여성적 글쓰기의 실천가’로 꼽힌다. 그의 책 『메두사의 웃음/출구』에는 두 편의 글이 실려 있는데 ‘출구’는 진정한 여성적 삶의 해방구에 대한 모색이고, ‘메두사의 웃음’은 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고찰이다. 메두사는 자기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남자들을 화석으로 만들었다는 여성 괴물이다. 그 신화에는 아름다운 여성에게 매혹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는 남성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 ‘메두사의 웃음’은 바로 그 매혹과 두려움이 만들어낸 남성중심 문화의 억압과 허점을 향해 던지는 웃음이며, 여성적 글쓰기의 출발점이다.

“여자들이 돌아온다. 멀리, 영원으로부터. 그리고 ‘바깥’으로부터. 여성은 자기 육신을 글로 써야 한다. 칸막이·계급·규칙·코드들을 무너뜨리는 언어를 만들어내야 한다. 여성은 머물지 않는다. 여성은 도처로 간다. 여성은 취하기 위해 준다는 역설도 벗어났고 하나가 되는 융합의 환상도 깨뜨렸다. 여성은 준다. 자신이 주는 것이 무엇인지 재지 않는다.”

엘렌 식수의 언어는 김혜순의 언어보다 더 분열적이고, 끓어오르고, 미끌거리고 폭발한다. 은유의 옷을 입고 환유의 모자를 쓰고 마음껏 분장했다. 언어의 질주가 육체의 해방으로 직결되며, 그만큼의 자유로움을 표출해 보인다.

롤로 메이라는 심리학자는 『창조성과 용기』라는 책에서 창조적 행위에는 절대의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창조가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에게는 두 배의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창조의 순간만이라도 생존법으로서의 언어를 벗어날 수 있는 용기, 본성의 목소리를 검열 없이 토로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상의 진실과 문학적 진실이 갈등할 때 그것을 조절하고 균형 잡을 수 있는 용기 또한 필요할 것이다.

김형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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