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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만에 시집 『시간의 동공』 펴낸 박주택 시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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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박주택 시인은 “나이가 들며 내면적으로는 출렁거려도 겉으론 차분한 느낌을 주는 시를 쓰게 된다”고 말했다. [박종근 기자]

중견 시인 박주택(50)씨가 다섯 번째 시집 『시간의 동공』(문학과지성사)을 펴냈다. 5년 만이다. 네 번째 시집 『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 이후 수확한 시 69편이 실려 있다.

박씨의 작업은 손쉬운 해석을 거부하는 계열이다. 평론가 이광호는 박씨 시가 “존재와 시간에 대한 철학적 사유, 현실에 대한 부정의 상상력, 단일한 전언으로 수렴되지 않는 입체의 시학”을 보여준다고 평한 바 있다. 시에 대한 해설조차 간단치 않지만 그런 ‘모호함’에라도 의지해 시집을 뒤적이다 보면 과연 박씨 만의 개성이 손에 잡힌다.

가령 이번 시집에서는 특히 시간적 배경이 저녁 무렵인 시들이 두드러진다(‘문득 나무 그늘 아래 저녁 눈 내릴 때’ ‘저토록 저무는 풍경’ 등). 낮과 밤이 몸을 섞는 저녁은 그 동안 저질렀던 광기와 수치를 고백하기 적당한 때이다(‘저녁 눈’).

문제는 이런 참회의 욕망 마저 해소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백은 입속에서 맴돌고 수치도 망각을 기다리는/눈치”이기 때문이다(‘저녁 눈’). 참회조차 허용되지 않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할 운명의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특유의 상상력을 통해서다.

표제시 ‘시간의 동공’에서는 신화 속 세계에서나 나올 법한 백마가 바닷가 백사장에 출현한다. ‘어둠 속에서’에서는 비상하려는 새를 형상화한 돌조각,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 내면을 묘사하는 사이에 느닷없이 “누군가는 묻곤 하지, 정말 귀신이 있어요?”라는 시행을 끼워 넣는다. 다중인격자의 발언이라도 보는 듯한 느낌이다.

박씨 시의 이런 개성은 특유의 시론 때문이다. 17일 박씨를 만났다. 그는 “한 시인의 세계를 하나의 테마로만 설명하려는 노력은 자칫 사고의 폭력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시가 뻔한 일상성 만을 드러낼 때 사소한 일기와 다를 바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의 시의 난해함이 수긍이 가는 발언이다. 그러면서 “이번 시집은 이전에 비해 한결 따뜻해졌다”고 했다. 맹인 안내견을 그린 ‘문양’ 같은 시가 그런 시다.

시 속에서 사건이나 사물을 만나기 보다 사건과 사물이 모여 이루는 세계에 대한 하나의 입장 표명(가령 박씨의 경우 허무주의적 세계관)이 두드러질 때 독자의 반응은 1차적으로 그런 세계관에 동의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관한 것이 될 것이다. 당신은 염세주의적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그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고도 박씨의 어떤 시들은 충분히 아름답고 절절하다. 감동이 필요하신 분들께 비극적인 빈곤 상속을 다룬 ‘유전하는 밤’을 추천하고 싶다. 

신준봉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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