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삶의 향기

시인 신현정 선생을 기리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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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상희구 시인은 시인의 웃는 모습을 추억했다. “대개 사람이 웃으면 눈이 작아지는데 이 사람은 웃으면 눈이 커지면서 옥니가 슬그머니 윗입술 위로 드러나는 것이다. 웃는 모습도 아주 슬로모션이어서 뇌에서 웃음을 전달받은 웃는 신경세포가 그의 얼굴 위에다 웃는 모습으로 전해지기까지 약 5초 정도 걸리는 것 같다”고 썼다. 허구한 날 점심을 쌍용빌딩 안 구내식당에서 한 끼 3500원짜리 식사로 해결하던 시인의 소박한 성품도 소개했다.

내게도 시인과의 인연이 있었다. 시인은 술이 거나해지면 전화를 했다. 한번은 제법 굵은 눈송이가 내리던 오전이었다. 어미 개가 새끼를 낳았다고 자랑을 했다. “새로 태어난 게 꼭 흰 밥알 같아. 얼른 보러 와.” 내일이나 모레 사이에 찾아뵙겠다고 말씀을 드렸지만 시인의 산기슭 집을 찾아간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었다. 갈피를 잡기 어려운 박정한 사람이라고 여기셨을 것이다. 시인이 마지막으로 발표한 시는 ‘현대문학’ 10월호에 실린 ‘해바라기’였다. 문인수 시인이 시인의 병실을 찾아가서 그 시를 낭송했더니 빙그레 웃으면서 좋아했다고 들었다. 시인은 평소에 “어느 순간 ‘나’가 팍 사라질 때 그때가 시가 시작되는 때야. 사물이 주인공이 되고 나는 엑스트라가 되는 거지”라는 말씀을 즐겨 하셨는데, 고슴도치, 오리, 다람쥐, 토끼, 달맞이꽃, 칸나, 분꽃, 제비꽃 같은 작은 생명들을 앞세워 그들을 노래했다.

유고시 ‘사루비아’만 읽어 보아도 순진무구한 시심을 엿볼 수 있다. “꽃말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 사루비아에게 / 혹시 병상에 드러누운 내가 / 피가 모자랄 것 같으면 / 수혈을 부탁할 거라고 / 말을 조용히 건넨 적이 있다 / 유난히 짙푸른 하늘 아래에서가 아니었는가 싶다 / 사루비아, 수혈을 부탁해.”

많은 시인이 신현정 시인의 빈소에 모여 시인이 생전에 쓴 시편들을 돌아가며 낭송하는 추도 시제를 가졌다. 나는 빈소 한구석에서 시인이 시집 『염소와 풀밭』을 출간하면서 쓴 짧은 글을 다시 읽었다. 당부의 말씀처럼 읽혔다. “이발을 했다. 주문 그대로 이발소 주인은 바리캉을 머리에다 우르르 갖다 댔다. (…) 까끌까끌한 머리를 손이 쓸며 머리카락이 사라진 파란 자국을 즐겼다. 오래간만에 평화한 온기를 손바닥에 담아 내렸다. 이렇듯 가끔은 해체시킬 것. 가끔은 어떤 식으로든 결벽 증세를 확인할 것.” 나는 이 글을 부의 봉투에 빼곡히 옮겨 적어 왔고, 그 후로 여러 번 들여다보게 되었다. 큼직한 판지(板紙)를 옆구리에 끼고 충무로역 계단을 내려오던 시인을 나는 마지막으로 보았다. 아주 슬로모션으로 시인은 웃고 있었다. 시인은 그 서글서글한 웃음을 데리고 어디로 가신 것일까. 그리운 사람은 너무 멀리 있다.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