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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포럼

동맹 발전 막는 핵 기술 족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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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기술의 진보는 필연적으로 국제환경을 바꾼다. 때로는 이것이 패권과 열강의 역학관계까지도 좌우한다. 증기기관과 핵물리학의 발달이 산업혁명과 핵무기 개발 등으로 이어지면서 각국 간 위상과 국제사회의 진로에 얼마나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는지는 이미 역사가 말해준다.

핵폭탄이 완성된 후엔 운반수단과 소형화 경쟁이 발생했다. 초창기엔 핵무기를 적국의 상공에 터뜨리기 위해서는 대형 수송기로 최소한 여덟시간 이상의 거리를 날아가야 했다. 하지만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이 개발되자 미국과 소련은 단지 30분 만에 상대방 국가에 핵탄두를 장착한 ICBM을 발사할 능력을 갖게 됐다.

대량살상무기의 개발을 가능케 하는 기술들은 엄격한 기술통제에 들어간다. 하지만 산업이 발달하면서 이러한 기술들이 과연 산업용 기술이냐 아니면 군수용 기술이냐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이른바 '이중용도 기술'의 급격한 증가가 1980년대 후반기에 나타난 이유다.

주요 선진국들은 이런 이중용도 기술의 관리에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다. 산업화의 고도단계로 이행하던 한국이 미국의 압력에 밀려 이중용도 기술에 관한 한.미 간 비밀특허협상을 맺은 것도 이때였다. 한국의 기술능력이 발달할수록 이중용도 범주에 들어가는 기술들이 많이 나타났다. 21세기 주요산업이라고 할 수 있는 원자력과 관련된 분야도 마찬가지다. 한국이 92년 한반도 비핵화선언을 통해 우라늄 농축 및 핵재처리 시설 및 기술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겠다고 발표하자, 국내의 핵기술자들이 반발한 것도 핵의 이중용도 때문이었다.

한반도 주변 4대 강국 중 현재 미.러.중 3개국이 핵을 보유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도발국이자 패전국인 일본은 핵폭탄은 없지만 핵무기 제조를 위해 필수적인 농축우라늄과 플루토늄을 수십㎏ 확보하고 있다. 여기다 미국의 관대한 지원과 용인하에 핵 재처리 및 농축시설을 운용 중이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수십기의 핵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것이다. 북한 또한 핵개발 의혹을 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19기의 원자로를 가동하고 있는 한국이 핵개발에 나서지 않고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의 성실한 수호자로 활동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한.미 동맹에 따른 미국의 핵우산 및 안보공약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과거 박정희 대통령 시절 핵개발에 대한 비밀 프로그램을 운용하려던 한국의 결정이, 한국의 안보에 대한 미국의 공약이 흔들리고 한.미 동맹이 시대적 변화에 따른 적응을 하지 못하면서 나온 것이었다는 점은 이를 방증한다.

최근의 우라늄 농축 관련 사건은 실험 과정, 장비 등을 놓고 볼 때 과학자들의 기술적 도전이자 호기심 차원의 것이었다는 데에 별다른 이의가 없다. 이는 미국과 국제원자력기구(IAEA), 그리고 관련 주변국 과학자들이 모두 공감하는 바다. 이 때문에 이번 사건의 본질은 핵무기와 연관된 한국의 시도라는 음모론적인 것이 아니라 핵연구의 도약을 막는 족쇄에 대해 한국 과학자들의 도전적 호기심과 기술능력이 이미 이를 극복하고 능가했다는 데에서 찾아야 한다.

미국은 최근 부시 대통령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연설에서 대테러전쟁에 나선 주요 맹방인 한국과 한국의 대통령을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한국민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바 있다. 의도되지 않은 실수라는 설명이 잇따랐지만 한국민의 상처난 자존심은 쉽게 아물 것 같지 않다. 맹방과 동맹의 의무를 언급하면서 일본과 한국을 차별하는 미국의 태도는 핵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이 21세기 한.미 동맹의 새로운 모델을 찾고자 한다면 이번이 호기다. 한국과 미국의 협력과 발전을 위해 이중용도 기술에 대한 많은 규제를 이번에 풀어야 한다. 크리스토퍼 힐 신임대사에게 그 같은 능력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인가.

김석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