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 쇼이블레 기민당수 "휠체어총리 꿈 끝내 꺾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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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독일 제1야당인 기민당의 볼프강 쇼이블레(58.사진)당수가 끝내 '휠체어 총리' 의 꿈을 접었다.

정신이상자의 총탄에 맞아 어이없이 장애인이 됐음에도 불굴의 의지로 독일 최고의 권력을 향하던 그의 야망은 비자금 스캔들의 풍랑속으로 스며들고 말았다.

정세판단이 냉철하고 빨라 독일 정가에서 "가장 머리 좋은 사람" 이라는 평을 들으며 '차기 총리감으로 여겨지던 그였다.

그러나 아무리 집념이 강해도 깨끗한 정치를 요구하는 독일 사회 분위기의 무게를 이겨내지는 못했다.

결국 그는 기민당 전체에 퍼진 비자금 파문, 검찰수사 압박, 하원의 2백40억원 벌금부과로 인한 당 재정 파산 위기 등 지난해 11월부터 몰아닥친 일련의 파장을 극복하지 못하고 16일 전격 사퇴했다.

"우리 당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을 희생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당의 위기가 민주주의의 위기로 번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

지난해 여섯 차례에 걸친 주의회 선거를 모두 승리로 이끌면서 2002년 총선에서 정권을 재탈환, 총리가 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가졌으나 무섭게 불어닥친 스캔들의 강풍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가 '휠체어 정치인' 이 된 것은 1990년 10월. 자신의 지역구가 있는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한 식당에서 정신이상자가 쏜 총탄에 맞아 하반신이 마비되는 중상을 입었다.

그는 여느 보통사람처럼 사고를 당한 뒤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왜 죽게 내버려두지 않았느냐" 고 외치며 슬픔에 잠겼다.

스스로를 "앉은뱅이" 라고 부르며, 성생활조차 하지 못하는 고민을 한 책에서 털어놓기도 했다.

그러나 장애가 그의 집념을 꺾지는 못했다. 게다가 부인과 자녀, 그리고 정치적 아버지인 헬무트 콜 당시 총리의 끊임없는 격려를 바탕으로 정치적 야망을 다시 불태웠다. 급기야 8년 뒤인 98년 야당 당수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42년 프라이부르크에서 태어난 그는 프라이부르크대와 함부르크대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65년 23세의 젊은 나이로 기민당에 입당, 일찌감치 정치인생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서른살이던 72년 연방하원의원이 됐다. 그의 놀라운 정치력에 탄복한 콜은 81년 그를 당 사무총장에 기용했으며 84년엔 총리실 장관으로 발탁했다.

콜의 두터운 신임으로 그의 정치적 업적은 눈부시게 이뤄졌다. 87년 에리히 호네커 동독 서기장의 서독 방문을 성사시켰고, 89년 내무장관으로 통일조약을 성안(成案), 베를린 장벽 붕괴 전후의 숨막히는 순간을 무리없이 처리했다.

총격 피습후 91년부터 원내총무를 맡아오다 98년 "쇼이블레가 후계자가 되길 바란다" 고 말한 콜의 결정적 도움으로 당수가 됐다. 이를 두고 그의 반대파들은 "콜의 그늘에서 커온 '왕세자' " 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의 사퇴는 기민당내에서 구세대가 물러나고 신진세력이 부상하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새로운 출발이 필요하다" 며' 주저없이 야망을 접은 그에 대해 더 타임스는 "쇼이블레는 구세대 중 가장 덜 부패한 정치인" 이라고 평했다.

정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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