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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 이윤택 총체극 '일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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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오는 30일까지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되는 '일식' 은 내용과 형식 모든 면에서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2000년 새해를 맞아 지난 1백년 동안 우리가 풀어내지 못한 숙제를 점검하고 향후 지향점을 찾아본다는 주제가 시의적절하고, 경기 도당굿의 가락을 살려내면서 서양 뮤지컬에 버금가는 음악극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실험적이다. 대사.춤.노래가 어울리는 총체극이다.

게다가 중견 극작가.연출가로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 이윤택이 그의 연극 인생을 중간 결산한다는 마음으로 작품을 올려 관심을 모았다.

일단 이윤택은 관객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막이 내리자 관객들은 앙코르를 연호했고, 일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 무대와 객석이 한데 어울리는 연극의 'ABC' 를 제법 성공적으로 보여주었다.

무대 전체는 안정된 분위기였다. 서울 광화문 일대를 재현한 세트, 중견.신인 연기자들의 호흡, 신명나는 군무 등이 보기 좋게 조화를 이뤘다.

공연 처음부터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 해가 까맣게 타들어가 사라지는 모습을 6분여 동안 무대에 투사해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내용 전개도 특이했다. 시작부터 끝까지 현재와 과거, 현실과 상상이 무대에 동시에 오른다. 명성황후 시해, 고종의 아관파천, 국권 상실 등으로 상징되는 우리 근대사의 크나큰 아픔과 아직 미래에 대한 방향조차 제대로 설정하지 못한 현재의 혼돈(광화문에서 갑자기 사라진 태양으로 표현)을 중첩시키면서 위기의 순간에 나라를 바로잡지 못한 위정자의 실책을 신랄하게 꾸짖는다.

하지만 접근 방식은 익살스럽다. 현대판 민중을 상징하는 전기수리공 김반장이 궁녀 차림으로 도망가는 고종에게 딴죽을 거는가 하면, 세종로를 지키고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을 끌어내려 "유신시절 이후 국토방위에 얼마나 수고가 많았습니까" 라고 격려하기도 한다.

한바탕 굿을 벌이려고 내려온 민족 제신들이 힘을 낸다면서 '박카스' 를 먹고, '마시자 한잔의 술' 을 부르는 순간엔 관객들은 작품의 묵중한 메시지에서 잠시 숨을 고르게 된다.

반면 이윤택은 작품에 많은 것을 넣으려고 했다. '도솔가' 를 지은 신라 고승 월명사에서 시작해 무속인이 숭상하는 고려의 최영 장군을 거쳐 근대사의 각종 사건과 최근의 IMF사태까지를 버무려놓아 긴장감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에피소드별 밀도는 충분히 살려냈지만 전체적 흐름은 다소 혼란스럽다.

특히 작품 막바지에 현대의 젊은 시인과 1백년 전 명성황후 시해 당시 살아난 궁녀 유실이 사랑에 빠지는 부분은 극의 분위기를 갑자기 반전시킨다.

극중 대사를 통해 지난 1백년의 정치적 실책을 이제는 문화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대목도 선언적 의미 이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02-763-1268.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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